설 연휴 정부의 정책문서를 뒤적이고 지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불현듯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한 약속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무상교육 실시! 집권 4년차인 현재 아무런 진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아예 손 놓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정책 의제다. 아마도 누리과정 예산 갈등 과정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단호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기억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선공약집 32쪽에 담긴 이 공약은 고교 진학률이 99.7%로 보편되었으며,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실시해왔다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이에 대통령이 되면 고교 무상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며, 수업료ㆍ입학금ㆍ학교운영지원비ㆍ교과서 대금을 무상 지원하겠다는 약속이다. 사립 자율고와 특목고의 무상교육 포함 여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므로 추후 검토하겠다는 친절한 설명도 빼놓지 않고 있다.
구체적으로 집권 2년차인 2014년부터 매년 25%씩 확대하여 2017년에 전면 무상교육을 실시한다는 실천계획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위해 교육기본법을 개정하고, 관련 예산을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저소득층 대상 교육급여 지원과 초중고 교육비 지원사업, 특성화고 장학사업, 농산어촌학생 지원사업 등으로 전체 고교생의 30%가 무상교육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은 가계 소득에 관계없는 고등학교의 보편적 무상교육을 약속한 것이다.
대선 승리 이후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교육비 부담 경감 차원에서 ‘고교 무상교육 단계적 추진’을 명시하였다. 교육부 역시 2013년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단계적으로 고교 무상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힘으로써 약속 이행의 기대를 갖게 하였다. 2014년 업무보고에서 시행 시기를 2015년으로 1년 늦추는 것으로 조정했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박근혜 정부가 설마 약속을 지키지 않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상 징후는 예산 편성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시행 시기를 1년 늦춘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2015년에 필요한 예산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고교 무상교육을 위해 교육부가 요구한 2,420억원을 재정경제부가 세수 부족 등을 이유로 단 한 푼도 편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2,461억원의 국고 편성 요청도 묵살되었는데, 이런 경험 때문인지 교육부는 2015년 대통령 업무보고부터 ‘고교 무상교육’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있다.
시행 시기를 1년 늦출 때도 교육부는 담뱃값 인상 등으로 여력이 생기면 시행하겠다는 궁색한 얘기를 늘어놓은 바 있다. 2015년 ‘공약 파기’라는 비판이 일자 2017년 한꺼번에 실시하는 게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라는 말을 꺼내 여론의 뭇매를 자초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교육부는 ‘현 정부 임기 내에 예산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게 교육부 입장’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주무부처로서 정책 추진 의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토록 ‘진실함’을 강조해온 대통령의 약속이 말 그대로 공약(空約)이 되어가는 형국이다. 외견상 그 이유는 교육부와 기획재정부가 책임을 떠넘기며 예산을 배정하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의 ‘국가재정운용 계획’(2015~2018년)을 보면, 박근혜 정부의 ‘공약 파기’는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 4년간 총 6조원 규모의 고교 무상교육 예산을 단 한 푼도 반영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상교육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국제적 표준(global standard)에 한참 뒤쳐져 있다. 독일ㆍ프랑스ㆍ스웨덴ㆍ핀란드 등이 모든 교육 단계에서 그리고 미국ㆍ호주ㆍ일본 등이 12~13년인데 반해, 우리는 고작 초ㆍ중학교 9년의 보편적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무상교육의 양적ㆍ질적 확충이 긴요한 과제라 할 것인데, 이는 한국교육개발원의 ‘2015 교육여론조사’에서 고교 무상교육에 대해 찬성(58.8%)이 반대(30.2%)보다 훨씬 높게 나타난 데서도 뒷받침된다. ‘진실함’을 강조하고 매사 ‘단호함’을 보이는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해본다.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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