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성 난청에 엿새간 병원 신세
이웃들 걱정에 "혼자 아니구나" 푸근함 느껴
길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뭘 잘못 실었는지 트렁크에서 잡소리가 좀 나는 것 외에는 거슬릴 것이 없었다. 농사 짓는답시고 쌀 서 말, 감 한 박스 외에는 부모님께 드린 자식 덕도 없는데, 이번 설에도 빈 아이스박스에 냉매만 가득 싣고 올라갔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신의 은총입니다” 20년 전 언뜻 봤던 글귀가 왜 그렇게 생명의 말씀처럼 자주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역귀성 중에는 항상 반대편 차선의 정체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구, 저 힘들어서 어떡하나. 오늘 안에 집에나 들어갈까?” 말했더니 아내는 내 걱정이 안 믿긴다는 듯 말했다. “즐기는 표정인데?” 아내는 나를 참 잘 안다. 시속 100km로 달리면서 반대편에 줄지어 선 차를 보면 그냥 한적한 도로에 비해 약간의 쾌감이 생긴다. ‘내가 못된 건가? 남의 고통을 근거로 만족감을 극대화시키는 변태인가?’ 자책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날 한 심리학자가 라디오에 나와서 나를 안심시켰다. “안정된 곳에서 다른 곳의 위기를 바라보면 인간은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남들도 그렇다는 얘기였다. 그는 강 건너 불구경과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싸움구경을 예로 들었다. 남의 어려움을 즐기라는 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고 해서 죄악시 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고마웠다.
서울 톨게이트가 곧 나온다는 표지판을 보고 콧구멍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어쩌다 서울에 가면 가장 먼저 도시를 느끼게 해주는 게 코딱지다. 안 파던 코딱지를 서울만 가면 하루에 두어 번 후비게 된다. 40년 넘게 파오던 콧구녕을 시골에 내려와서는 잊고 살았는데, 서울 갈 때마다 존재를 깨닫게 한다. 아무래도 파내야 할 것 같아서 그나마 슬림한 새끼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는데 갑자기 아내가 어깨를 후려쳤다. “운전하다가 눈을 감으면 어떡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오른쪽 코를 파내느라 나도 모르게 오른쪽 눈을 감았더니, 오른쪽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내는 두 눈을 다 감은 줄 알고 그랬던 거다. 사실은 갑자기 얻어맞은 내가 더 놀랐다. 코 후비다가 총소리에 코피 흘렸던 곰처럼 될 뻔했다. 아내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다 내 탓으로 돌렸다. “또 어지러워서 그런 줄 알았지...”
지난달 말에 쌀, 청국장 등 올해 첫 판매 행사를 진행했다. 1주일간 신청을 받으니 수요와 공급이 얼추 맞았다. 청국장 띄우고, 나락 도정해서 포장하는 것까지 계산하니 계획하고 공지했던 대로 끝낼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D-4 뭐 좀 쑤어보겠다고 밤을 샜지만 낮잠이라도 좀 잤으니 몸이 가뿐한 듯 했다. 청국장 콩이랑 미뤄놨던 메주콩까지 큰 솥 두 개에 세 세트를 삶아야 한다. 바닥에 눌어붙으면 안 되니 불 때면서 계속 지키고 서서 큰 주걱으로 훑어줘야 했다. 푸근하고 햇살 좋던 날씨는 해거름이 되면서 바람이 거칠어졌다. 일기예보엔 밤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마음은 급한데 손이 더뎠다. 겨우 한 판 삶아서 콩을 찧고 메주 덩어리 만들고 나니 어두워졌다. 간전댁할머니가 오셨다. 일부러 말씀 안 드렸는데 선물 받은 홍게를 어떻게 삶아야 되냐고 들고 오신 거다. “콩 삶을 때 말씀허시랑게...” 할머니는 오히려 서운하신 듯 나무랐다. 아내가 쪄 준 홍게로 저녁을 마치고 다시 나와 콩을 삶았다. 할머니한테는 제발 나오시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고 두 판 째를 마무리했다. 날이 영하로 떨어졌는지 메주덩어리가 잘 뭉쳐지질 않았다. 어쨌든 겨우 마무리하고 나머지는 내일 삶기로 했다. 할머니는 댁으로 돌아가시면서 걱정하셨다. “선재아빠 얼굴이 안 좋은디. 무리허지 말아요.”
D-3 아침에 다시 삶은 콩이랑 전날 뭉쳐 놓은 메주덩어리를 싣고 농막으로 갔다. 깨끗하게 털어놓은 볏짚을 깔고 메주를 놓은 뒤 다시 볏짚을 덮었다. 아직 뜨끈한 콩은 광주리에 볏짚을 깔고 부은 뒤 군데군데 볏짚을 묶어 꽂았다. 보자기로 덮고 담요를 얹어 마무리하고 나니 또 해질녘이었다. 몸살 기운이 오는 듯 했지만 물건 다 발송하고 나면 설 연휴까지 푹 쉴 참이니 버틸 만 했다. 뜨끈한 차 한 잔 마시고 라디오를 켜니 다시 추위가 찾아오고 남부지방에 눈도 내릴 거라고 했다. 괜찮았다. 포장은 창고에서 하면 되니 내일 아침 도정만 하면 뭐...
D-2 “오늘 도정 못해요.” 정미소주인은 단칼에 잘랐다. “아직 눈도 안 오고 오전에 하면 되는데 왜요. 금방 싣고 갈게요 네?” 목소리로나마 슈렉 고양이 흉내를 내 봤지만 소용 없었다. “날이 흐리고 습도가 높아서 도정해도 안 좋응게 내일 전화 주쇼잉.” 아내와 상의한 끝에 사흘 뒤에 예약돼 있는 건강검진을 미루고 그날까지 도정해서 보내기로 했다. “그러게 좀 미리 도정해놓으면 좋잖아. 어차피 쌀 받은 날 다 먹는 것도 아닌데 꼭 고집을 부려요.” 아내가 잔소리를 했지만 잘 듣지 않았다. 쌀은 도정한 날이 제일 맛있다. 아내도 그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도정할 때마다 동동거리던 내 모습이 적잖이 안쓰러웠을 터이다. 일단 다른 것부터 포장을 시작했다.
D-1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내 머리도 하얘졌다. 밤새 내린 눈이 얄밉게 길을 덮었고, 그래도 혹시나 하고 정미소에 전화하려는데 다시 눈이 내렸다. 포기했다. 청국장이라도 포장하려고 신발을 신는데 갑자기 바닥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1년에 한 두 번 이럴 때가 있었는데 또 그랬다. 한참 현관에 걸터앉아 있으니 한결 나아졌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좀 쉬기로 했다. 신문사 시절, 눈 스케치 사진 취재가 싫어서 눈을 미워한 이래 창 밖에 내리는 눈이 이렇게 밉기는 처음이었다. 속 없는 놈은 하염없이 계속 내렸다.
D-Day “오늘 놀러 가요. 도정 못해요.” 눈도 그쳤는데 기가 막혔다. 정미소가 국가 기관도 아니고, 주인이 공무원도 아니니 “지금이 놀러 다닐 때냐!”고 할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추워서 안 해요” “상갓집 갔다 와서 자야 돼요” 라며 끊거나 아예 전화를 안 받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음에는 정미소집 아들로 태어나야지’ 생각도 했지만 급선무는 아니었다. 어쩔거나... 생각하는데 다시 어지럽기 시작했다. 전날과 달랐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천장이 계속 돌았다. 모든 게 시계방향으로 돌다가 눈을 깜빡이면 그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도는 식이다. 아내는 볼 일이 있어 순천에 갔고, 어쩔 수 없어 그냥 한참을 누워있었다.
TV를 켜니 마침 가운을 입고 온 의사들이 뇌졸중 얘기를 했다. 그 양반들이 말하는 전조증상 몇 가지를 테스트해봤지만 다행히 해당되는 건 없었다. 혹시 며칠 전에 그 증상은?... 똥을 누고 뒤처리 하다가 갑자기 옆구리 근육이 결렸다. 여느 때처럼 반대편으로 힘주면 풀리겠지 하고 왼손으로 처리하는데 그쪽마저 결렸다. 혹시나 주의 깊게 들어봐도 전조증상에 그런 건 없었다. 하루 종일 나만 가만히 있고 온 세상이 돌았다.
늦게 귀가한 아내는 야단을 치며 당장 응급실 가자고 채비했지만, 국민학교 때 치과 끌고 가려던 엄마와 힘겨루기 하던 실력으로 끝내 버텼다. 다음날도 모든 게 시계방향이었다. 아내와 읍내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이석증(耳石症)’이라고 진단하며 머리통을 이리 저리 흔들고 돌렸다. “내일이면 괜찮을 겁니다” 하길래 “왼쪽 귀가 잘 안 들려요” 했더니 “이석증 증상에 그런 건 없는데...”가 끝이었다. 아내는 바로 광주로 차를 돌려 귀를 잘 본다는 종합병원으로 몰았다. 의사는 ‘돌발성 난청’이라는 진단과 함께 바로 입원을 명했다. ‘청국장 띄운 것만 담아 놓고 오면 안될까요’ 묻고 싶었지만 의사가 농사를 이해할 리 없었다.
그렇게 엿새를 병원에서 썩었다. 제주도와 남부지방이 눈에 파묻혀 준 전시상태를 맞았던 딱 그 기간이다. ‘금방 낫겠지’하는 기대는 근거 없었고, ‘광주라서 병원밥도 맛있겠지’ 하는 기대도 엇나갔다. 우사인 볼트와 맞짱 떠도 될 만큼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도 비틀거리며 퇴원했다. 설은 다가오고 물건은 보내야 하는데 아직 몸은 그 만큼이 안됐다. 주문한 분들에게 사과 문자를 보냈더니 “급하지 않으니 몸부터 챙기세요” “안 굶어 죽으니 걱정 마세요” 위로를 보내왔지만 마냥 있을 수는 없었다. D동생에게 전화했다. 동생을 전화를 받으면서 첫마디로 “형님 편허게 말씀허세요” 했다. 나도 짧게 말했다. “도와다오.”
동생은 그날로 달려와 아내와 함께 청국장 갈무리를 하고 포장 작업을 했다. 다음날 아침 나락을 트럭에 실어 놓고는 나주에 볼일이 있어 마무리 못해 미안하다며 떠났다. 마침 이장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정미소 좀 갔다 와 달라”고 부탁했고, 기꺼이 다녀온 보답은 짜장면으로 갚기로 했다. 옆 마을 동생은 도움 필요하면 말하라고 전화했다가 나무라는 말을 늘어놨다. “형님, 폐 안 끼칠라고 하는 맘은 알겄는디 도와달라고 말이나 좀 하고 사쇼. 내 일 팽개치고 형님 도와줄까 봐 걱정허슈? 형님이 딴사람 도와줄 마음만큼 다 있응게 일단 말이라도 해 보란 말이유. 왜 그래싸요 일본놈들처럼!” 그 친구는 몇 년 전 일본 홍수 때 헬기로 구조된 할머니가 구조대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나 때문에 폐를 끼치게 돼 미안하다”고 했던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간전댁할머니의 걱정, 전 이장님과 오봉댁어머니의 병문안, 이장 친구와 동생들의 응원과 도움 덕에 연휴 전날 배송을 마쳤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푸근하기도 하고 서울 가는 길도 그래서 그나마 마음이 가벼웠다.
아내는 단단히 다짐을 받고 싶었는지 조수석에서 발송 일주일 전 나락도정을 세차게 외쳤다. 운전중 코딱지 색출 금지도 요구했지만 그건 보장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푸는데 근처에 사는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 왔냐? 술 한잔 하자!” 몸이 썩 좋지 않아서 술은 힘들겠다고 했더니 선배는 일장 연설을 했다. “인마, 시골 내려갔으면 몸이 더 좋아져야지 왜 그 모양이냐. 뭐 스트레스 받냐? 그럴라믄 뭐 하러 내려갔냐.” 좋게 대답해줬더니 말을 줄이지 않는다. 근데 말투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거나 “인마 난 여기서두 잘 사는데 거기까지 가서 왜” 같은 말이 이어졌다. ‘이 선배도 혹시 나처럼 불구경 변태증상인가?’
이젠 그런 사람들한테 전화오면 이렇게 대답할거다. “저요? 아파본지 5년 됐구요, 사람들이 감기는 왜 걸리나 모르겠어요. 약국이요? 나 겉으면 제약회사들 다 망하죠. 왜요, 도시에선 요즘 같은 세상에두 어디 아프구 그러세요? 이해가 안되네요 왜 그러구 사는지...” 으으 시원하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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