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지젝의 최신 에세이 6편을 묶어 만든 이 책은 소위 가성비가 떨어지는 책이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첫째, 1장을 독해하기 위해서는 선행학습이 필요하고 둘째, 선행학습이 충분히 된 독자라면 더 딱딱하고 두꺼운 책에 도전할 테니까. 다만 중국 경제와 시리아 난민문제, 그리스 사태에 대한 지젝의 입장이 궁금하지만 영어가 ‘짧은’ 독자에게는 요긴하다.
하이데거에 대한 지젝의 도발적인 사유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2008) 3장에 이 책보다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헤겔의 변증법을 ‘정반합’으로 설명하듯 대단히 단순화해서 이 부분을 요약하자면, 하이데거는 나치즘을 자본주의, 자유주의 폐해를 혁신하는 일종의 ‘사건’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건이 아니라 ‘유사사건’이란 점에서 지젝은 “하이데거가 1933년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평가한다. (다시 ‘정반합’식의 설명을 덧붙이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개념어인 ‘사건’은 기독교인에게 있어 예수의 죽음과 부활처럼, 사건 이전과 이후 사회 구조가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다만 그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바뀌는 것과 같은 변화를 뜻한다.) 지젝은 나치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으며 나치 폭력은 충분히 폭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요컨대 그 자신이 경멸하는 질서(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존하는 무력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사사건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은 이런 주장이 나온 후인 2014년 ‘검은 노트’(1931년부터 1960년 초까지 하이데거가 쓴 수기)가 출간되며 시작한다. 1장은 검은 노트에 쓰인 하이데거의 정서를 ‘반유대주의’로 해석, 하이데거 이론 자체에 모순이 있다며 “인본주의, 민주주의, 진보 등과 같은 근대성의 기본 교의에 대해 제기하는 불편한 문제들과 대면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하버마스와 그 추종자들을 비판한다. “하이데거가 (검은 노트에서) 히틀러를 비난한 것은 나치의 입장 때문이 아니라 나치 또한 테크놀로지 허무주의자들의 조작에 굴복해, 그와 관련해서 항상 더 많은 책임이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처럼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나치 지지는 그의 사상의 직접적인 핵심이나 내적 진실이 아니라 일종의 증상, 그의 사상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부수적인 현상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젝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이 ‘부수적 현상’이라고 보는 듯하다. “여기서는 상황이 실로 암담해진다. 1942년 하이데거가 유대인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정치 유형과 정치 행위는 상대가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절멸에 참여하는 입장에 놓이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죽음은 ‘유대인의 자기 절멸’ 행위로 이해돼야 하는 것이다. (…) 하이데거가 검은 노트 4권에서 말한 대로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것이 유대적인 것에 맞서 투쟁할 때 역사상 최고의 자기 절멸이 이루어진다.’”
지젝이 좌파의 노선에서 저 창의적이면서 복잡한 읽기를 해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시리아난민에 대한 유럽의 반응(3장), 자본주의적 사회주의 길을 가는 중국 경제(4장), 그리스 사태(5,6장)에 대한 분석도 마찬가지로 세계의 문제는, 그러니까 자본주의에 있기 때문에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은 무자비한 자본주의적 뿌리 상실이라는 영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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