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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정부’ 김수환 추기경 공식 전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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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정부’ 김수환 추기경 공식 전기 나왔다

입력
2016.02.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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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1월 26일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군을 위해 연 미사에서 “이런 정권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중대한 양심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사 제공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1월 26일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군을 위해 연 미사에서 “이런 정권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중대한 양심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사 제공

“여러분은 과연 국가보위특별조치법의 입법이 국가안보상 시기적으로나 정세적으로나 필요불가결의 것이라고 양심적으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중략)만약 이 법이 통과되어서 대통령이 이 법을 수행한다면 국민은 대통령을 신뢰하고 존경하기보다 그 분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나머지 그 분을 경원하게 될 것입니다. 경원하는 나머지 그 분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1971년 성탄절 0시. KBS가 김수환 추기경의 성탄절 메시지가 담긴 미사 강론을 생중계 방송하던 중에 나온 발언이었다. 당연히 미리 배포된 강론 원고에 없었던 내용이었다. 유신을 앞두고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입법 작업이 한창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는 소란스러워졌다. 즉각 방송 중단을 위해 이리저리 뛰었건만 마침 책임자가 자리를 비웠다.

얼마간 더 이어지던 작심 비판 중계 방송은 이윽고 중단됐고, 걱정하는 이들이 미사를 끝낸 김 추기경 곁에 몰려들었다. “잡혀가면 잡혀가는 거지, 허허….” 김 추기경의 짧은 대답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관계 기관 대책회의가 열렸다. 좀 지나 165명이 목숨을 잃는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미사 강론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2009년 선종한 김 추기경의 7주기를 맞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아, 김수환 추기경’(김영사)이 출간됐다. 그간 김 추기경의 삶을 다룬 책은 있었으나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정식으로 인정한 전기로는 처음이다. 박정희 정권 때까지를 다룬 1권 ‘신을 향하여’와 이후를 다룬 2권 ‘인간을 향하여’를 합쳐 모두 1,132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다.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등의 전기를 쓴 이충렬 작가가 썼고, 가톨릭사를 깊이 연구한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가 감수했다.

1942년 일본 조치대 유학 시절 형 김동환의 삭발례에 참가해 기념 사진 찍은 김수환 추기경(앞줄 맨 왼쪽). 스무살의 웃음이다. 김영사 제공
1942년 일본 조치대 유학 시절 형 김동환의 삭발례에 참가해 기념 사진 찍은 김수환 추기경(앞줄 맨 왼쪽). 스무살의 웃음이다. 김영사 제공

이충렬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공개된 강론이나 편지, 저술은 물론, 개인일기를 참조했고 관련된 인물이 있으면 인터뷰도 했다. 특히 사진 자료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김영사는 책에 실린 사진 360여장 가운데 100여장 정도가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라 밝혔다. 작가는 ‘저자의 글’에서 “사진 구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털썩 주저앉고 싶을 때도 여러 번이었지만 새로운 사진을 찾는 성취감에 다시 일어서곤 했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을 다룬 사진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또 하나의 정부’로 불릴 만큼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김 추기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시위학생들이 모인 명동성당에 진입하려는 경찰에게 “나를 먼저 밟고 넘어가라”고 일갈한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책에서 눈에 띄는 건 김 추기경의 보수적인 면모다. 말년에 김 추기경은 친북ㆍ반미는 안 된다는 이념 공세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도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의견도 내놨다. 가톨릭 내ㆍ외부에서 우려하는 발언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진보적 추기경이 나이 들어 보수적 추기경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놓고 반발한 지학순 주교를 집요하게 탄압했다. 1975년 2월 석방되는 지학순(가운데 흰옷) 주교와 그 뒷편에 서 있는 김수환 추기경. 김영사 제공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놓고 반발한 지학순 주교를 집요하게 탄압했다. 1975년 2월 석방되는 지학순(가운데 흰옷) 주교와 그 뒷편에 서 있는 김수환 추기경. 김영사 제공

1956년 유학 때 가톨릭의 적극적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독일 뮌스터대학 요제프 회프너 교수를 만났고, 교회가 사회 속에 있어야 한다는 1962년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관심 있게 지켜본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교황청도 이런 김 추기경을 높이 평가해 1967년 최연소 추기경으로 뽑은 반면, 교회의 사회 참여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은 교황청에 투서와 고발을 일삼기도 했다.

동시에 김 추기경은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교조적인 좌파이론에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민주화 열기가 들끓을 6월 항쟁 당시에 이미 김 추기경은 민중봉기나 좌경화에 기울어진 혁명에 대해 “문제 해결이 아니요, 더 큰 불행을 가져올 염려가 너무나 명백하다”는 반대 이유를 여러 차례 밝혔다. 이 때문에 김 추기경은 보수화된 거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 하고 은근히 걱정”했다며 너끈하게 받아넘겼다.

저자는 이 책의 인세 절반을 김 추기경이 만든 옹기장학회에 넘기기로 했다. 옹기는 김 추기경의 마음 속 아호로 박해시대 선조들의 생계수단이기도 했거니와 사도 바오로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보화를 담기에는 너무나 약한 질그릇’에 비유한 데서 따왔다. 그리고 그토록 싫었던 사제의 길로 인도한 김 추기경의 부모님도 옹기장수였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2007년 10월 한 전시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자화상 '바보야' 앞에서 웃고 있다. 김영사 제공
2007년 10월 한 전시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자화상 '바보야' 앞에서 웃고 있다.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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