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중 8장이 남성 매출” 인 LP시장
CDㆍ공연 시장과 정반대
추억 집착, 조립 등 “LP 남성적 매체”
많은 여성 가수들은 CD판매량 얘기만 나오면 울상을 짓습니다. 신곡의 인기가 높아 멜론 등 온라인 음원 차트 정상을 휩쓸어도 대부분이 음반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간 음반판매량 톱10(가온차트 기준)에 든 여성 가수는 걸그룹 소녀시대(2011·2013·2014)와 소녀시대의 유닛인 태티서(2012) 뿐이었습니다.
여성 가수들의 히트곡이 없어서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걸그룹 티아라는 ‘롤리폴리’란 곡으로 빅뱅, 비스트 등 보이그룹을 제치고 2011년 연간 음원차트 1위를 차지했는데도 CD판매량에선 20위 안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같은 해 ‘론리’(4위)와 ‘내가 제일 잘 나가’(7위)란 노래로 음원 차트를 휩쓴 걸그룹 2NE1도 음반 판매량에선 10위권 밖으로 밀려 나야 했습니다. 3단 고음으로 유명한 ‘좋은날’과 ‘너의 의미’ 등 신곡을 냈다 하면 음원차트 1위를 하는 아이유도 연간 음반판매량에서 10위권 안에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여성 가수들이 유독 남성 가수에 비해 CD판매량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는 여성 팬덤(fandom)이 상대적으로 약해서입니다. 팬덤은 특정 인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나 그런 문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팬덤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게 CD시장입니다. 음원시장이 불특정 다수가 월정액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용하는 보편적 시장이라면, CD시장은 열혈 팬들이 이끄는 특수 시장의 성격이 짙습니다. 음원사이트에서도 클릭 한 번으로 곡을 들을 수 있는 현실 속에서 굳이 만 원이 넘는 돈을 내고 CD를 사게 되는 행위엔 그만큼 적극적인 문화 소비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런 CD시장은 여성 소비자 위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남성보다 여성이 문화 소비에 더 적극성을 지닌 데다, 여성 팬덤을 확보하는 데 남성 가수, 특히 보이 그룹이 유리하기 때문이죠. CD시장에서 남성가수들이 빛을 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CD시장뿐 아니라 콘서트ㆍ뮤지컬ㆍ연극 등 공연시장과 영화시장도 여성 소비자들의 ‘입맛’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는 건 문화계의 상식이나 다름 없었죠.
이런 문화계에 유독 남성의 ‘입김’이 강한 시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LP시장입니다. LP문화 부활을 다룬 ‘복고 접해볼래! 2030 LP에 빠져들다’(본보 2월6일자 2면) 취재를 위해 교보핫트랙스에 의뢰해 지난 2년 간 성ㆍ연령별 LP매출을 알아보니 2015년 매출 중에 남성(10대 이상) 소비자의 시장점유율이 무려 77.6%에 달했습니다. 2014년에는 이 보다 높은 85.6%로 조사됐습니다. 2014~2015년만 따졌을 때 LP 10장이 팔리면 8장을 남성이 샀다는 얘깁니다. 남성 소비자가 이렇게 높은 매출을 차지하는 건 문화계에선 이례적인 일입니다. 공연 티켓 예매 전문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지난해 뮤지컬 관객 동원 1위는 ‘팬텀’이 차지했는데, 티켓 예매자의 85.7%가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공연ㆍ영화 시장과 정반대로 LP시장은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LP의 주 소비층이 남성 40~50대라는 데 주목했습니다. 남성 LP 소비자 가운데에서도 40~50대는 두 해 평균 시장점유율 약 58%을 차지할 만큼 압도적으로 시장을 주도했습니다. 이를 두고 정신과 전문의인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놨습니다.
“현 40~50대가 음악을 한창 듣기 시작했던 10~20대에 즐겨 들었던 게 LP입니다. 점점 잃어가고 있는 순수함과 열정을 찾을 수 있는 상징적인 매체가 LP인 거죠. 이 추억을 중년 남성들이 LP에서 찾는 겁니다. LP는 턴테이블과 LP도 관리해야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취미잖아요. 조립식 장난감을 남성이 좋아하는 것처럼, 중년 남성들이 여성보다 LP를 더 취미로 선호하는 거라 볼 수 있죠.”
“여성 보다 남성이 옛날 것을 더 좋아하고 집착한다”는 손 원장의 의견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 첫사랑에 집착하는 건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하죠? 현재에 더 관심을 두는 여성과 달리 과거에 대한 애정이 큰 남성들이 사용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LP라는 옛 매체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란 추정도 가능합니다.
중년뿐 만이 아닙니다. 10~30대를 기준으로 해도 지난 2년 간 남성 소비자의 평균 매출이 전체의 15%로, 여성(11%)보다 앞섰습니다. 취재를 위해 만나 본 10~30대 남성 LP구매자들 중에선 LP를 모으게 된 계기로 “턴테이블에 대한 관심”을 먼저 꼽은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LP만이 주는 따뜻한 소리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지만, 턴테이블이란 장비에 대한 호기심도 LP구매에 크게 작용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직장인 이현민(37)씨는 “교보 핫트랙스 광화문점에 책을 사러 갔다가 음반 매장 옆에 전시된 턴테이블을 보고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에 주문해 그 뒤로 지난달부터 LP를 모으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대학원생인 박찬(25)씨도 “2013년 아는 형에게서 휴대하면서 외부에서도 들을 수 있는 LP플레이어를 선물 받으며 LP를 하나 둘씩 사게 돼 LP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고 했습니다. 찰칵 하는 셔터소리 등 카메라의 ‘손맛’에 빠져 수동카메라에 열광하는 남성들이 많은 것과 비슷한 이유죠.
그렇다면 LP에 대한 여성들의 이미지는 어떨까요? 20~40대 여성 10명에게 “LP의 이미지가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고 물었더니 9명이 “남성적”이란 답변을 줬습니다. 직장인 박민희(41)씨는 “LP얘기를 들으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르더라”며 “LP를 사랑하는 남자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LP를 사랑하는 여자는 왠지 낯설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LP하면 “올드보이” “아저씨” 가 떠오른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LP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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