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강만후)
“난 억울해! 억울하다고!”(연민정)
“버러지 같은 게, 인간 같지도 않은 거 밥 해 먹이고”(서은하)
연기력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안방극장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데 토를 달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아까운 연기력이 ‘막장드라마’에서 썩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최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는 MBC가 일일극 ‘압구정 백야’에 대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징계를 취소해달라고 제기한 소송에 대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MBC는 방송사로서는 처음으로 심의에 불복해 소송을 냈지만 재판부는 “지상파 방송사는 가족시청 시간대에 가족구성원 모두의 정서와 윤리수준에 적합한 내용을 방송할 책임이 있으며, 이 의무를 위반한 정도가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것이 tvN ‘응답하라’시리즈, ‘미생’, ‘시그널’ 등 케이블 채널의 명품 드라마에 밀리며 체면을 구기고 있는 지상파 방송의 현실이다. 탄탄한 스토리와 영상미, 디테일한 구성 등 그 어느 것에도 맞서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막장드라마를 지탱하는 건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뿐이다. “드라마의 열쇠를 쥐고 시청률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건 연기력이 뒷받침된 배우들”이라고 말하는 방송사 PD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연기 잘하는 배우들에게 소리나 지르고, 살인미수, 감금, 납치, 협박 등을 일삼는 일차원적인 연기만을 맡기는 건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훌륭한 연기력을 발산하지만 작품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장드라마라는 핸디캡이 있어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해서다. 그들의 연기력이 아까운 이유다.
▦40년 연기 내공, 악의 축 손창민
최근 시청률 34%까지 찍으며 지상파 방송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는 MBC 주말극 ‘내 딸, 금사월’은 손창민(50)의 연기가 볼거리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의 악역 연기를 두고 “‘내 딸, 금사월’의 또 다른 제목은 강만후”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드라마 제목이기도 한 금사월 역의 백진희와 신득예 역의 전인화가 강만후 역의 손창민만큼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시청자들도 많다.
7일 방송된 ‘내 딸, 금사월’에서도 강만후는 천비궁 재건을 위한 소나무를 빼돌리려다 덜미가 잡히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자신의 잘못도 반성하지 않은 채 회장 자리에 복귀하려는 안하무인 격인 모습과 집에서 쫓겨나 빈털터리 신세가 된 강만후의 만행이 짙어질수록 손창민의 연기 내공이 빛을 발산하는 건 당연하다.
끄떡하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으악!”하고 소리를 지르고,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야비한 강 사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연기 내공만 40년이 넘는 그에게 그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까. 그러나 그는 지난해 MBC ‘연기대상’에 대상 후보로도 거론되지 못했다. ‘내 딸, 금사월’의 높은 시청률 중 8할을 담당하고 있는 그이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악역을 담당하지만 화면을 꽉 채우는 연기력에 ‘후블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럼에도 매 회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대로 감정을 노출하는 역할이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연기가 끝나며 많이 어지럽고 성대도 조심해야 한다”며 악역 연기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복수의 화신이 떴다, 천의 얼굴 이유리
지난 1일 첫 포문을 연 KBS2 일일극 ‘천상의 약속’은 방영 전부터 배우 이유리(36)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화제가 됐다. 지난해 MBC 주말극 ‘왔다! 장보리’로 ‘악역의 달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연기력만큼은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이틀롤 장보리 역의 오연서를 누르고 ‘MBC 연기대상’ 대상까지 거머쥔 걸 보면 시청자의 마음을 확실히 움직였다. MBC ‘연기대상’은 시청자들의 온라인 투표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도 심상치 않다. ‘왔다! 장보리’로 살인미수, 납치, 감금, 협박 등 온갖 악행들을 서슴지 않으며 버럭, 오열의 막장 종합세트 연기를 선보였다. ‘천상의 약속’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 아무나 할 수 없다는 1인2역 연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생활력이 강하고 가족과 연인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성품의 여인과 부잣집 외동딸이자 까칠하고 도도한 시사주간지 기자로 말이다. 언뜻 보기에도 극과 극 설정이라 볼거리가 충분해 보인다.
이유리는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 한 연인에게 배신 당하고 외모가 똑같은 재벌집 딸로 위장해 복수하는 캐릭터다.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선한 모습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변신하는 단편적인 연기가 또 한 번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SBS ‘아내의 유혹’이 떠오르는 건 이상한 걸까.
▦우아하지만 거침없는, 독설의 꽃 이보희
법원이 방통심의의 제재를 인정한 드라마 ‘압구정 백야’는 중견 배우 이보희의 탁월한 연기가 더해져 더욱 질타의 대상이 됐다. “버러지 같은 게, 인간 같지도 않은 거 밥 해 먹이고” “너 같은 미물보다 훨씬 더 예쁘고 매력 있고 젊고 능력 있는 여자 찾아서 붙여 줄 거니깐. 헌신짝처럼 버려지게” 등의 대사로 물세례를 퍼붓고, 뺨과 머리를 구타하는 장면은 시청자들도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충격적인 장면 탓에 연기력이 묻혀버린 경우다. 막장드라마만 아니었다면 역대급 연기로 인정 받았을 것이다.
30여분 동안 백야로 출연한 신인 배우 박하나에게 독설을 퍼붓던 이보희는 차분하면서도 표독스런 카리스마로 ‘압구정 백야’의 히로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도 막장드라마에 합류해 안타깝다. MBC 일일극 ‘내일은 승리’는 막장드라마의 필수 요소인 살인, 감금, 공갈, 협박, 절도 등을 극중 인물 서재경(유호린)을 통해 그리고 있다. 이보희는 그 서재경의 엄마 지영선으로 등장한다. 재벌그룹 회장의 아내이지만 겉모습과 속이 다르고, 딸 재경을 회사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욕망에 휩싸인 캐릭터다. ‘압구정 백야’와 서은하와 다른 것 없는 이중인격자 역할인 셈이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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