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 차려지기까지의 노고 모른 척
아빠도 그랬지만 ‘다 함께 노동’이 맞더라
고향 못 가는 명절의 그늘도 함께 생각해보자
일곱 살 딸 지유에게.
해마다 찾아오지만 설은 늘 특별한 날인 것만 같구나. 네가 생일을 앞두고 ‘탄생’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예쁜 초를 꽂은 케이크를 먼저 떠올리며 달뜨는 것처럼, 설 명절은 해가 바뀐다는 역법적 의미보다는 가족이 오랜만에 얼굴 마주하고 한 상 거하게 차린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 때문에 더 가슴 설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설 차례상이 차려지기까지는 적잖은 노고가 있게 마련이지. 남녀평등이니 가사부담이니 한지가 오래지만 여전히 그 노고의 대부분을 여성이 감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란다. “그런 건 여자들 일이야”라는, 그냥 지금껏 살아온대로 생각하는 남자들의 목청 높히는 소리는 기각하더라도, “여태껏 그랬던건데 뭐…” “어른들 눈치 보여서…”라며 소극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남자들도 적지 않단다. 아빠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해야겠지.
그러나 조상을 기리고, 온 가족이 정다운 한때를 보내는 날이라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다 함께 노동’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최근 회사 동료들과 전을 부치며 새삼 절감했단다. 전 부치는 남자들을 바라보던 네 엄마 얼굴에 가득 번진 미소를 지유는 보았니. 전을 부치면서 얼핏 떠오른건데, 명절이 되면 가가호호 차례를 지내느라 이런저런 몸살을 앓기 마련인데 그럴거면 왜 차례를 지내야 하는지 이 아빠는 시간을 두고 곰곰 생각해볼 참이야.
그런데, 이런 시비라도 가려볼 수 있는 건 그래도 갈 수 있는 고향이 있고 만날 가족이 있기 때문이잖니. 지금 이 사회에는 고향과 가족이 있어도 귀향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단다. 아니 아예 돌아갈 고향도, 만날 가족조차 없는 사람도 있지. 시급 6,000원의 청년 알바, ‘열정 페이’를 강요 받는 인턴, 정규직 절반의 임금으로 빠듯하게 가계를 지탱하는 비정규직,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다 쫓겨난 해직노동자, 폐지 주워 입에 풀칠하는 독거 노인, 보이지 않는 가정폭력으로 시시각각 생사의 기로에 선 어린이와 여성들…. 귀성으로 텅 비어 버린 서울 거리 한 켠에 서있을 이들에게 어쩌면 명절은 그 자체로 폭력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네가 성인이 되었을 20년 뒤에는 전체 가구 구성의 3분의 1이 ‘1인’이란다. 이런 변화를 생각하면 그때쯤에는 명절에는 이래야 한다는, 지금은 강고한 사회통념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바뀌어 있을 거라 이 아빠는 의심하지 않는단다. 그 즈음엔 아마도 남의 행복을 훼손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각자의 행복추구’가 상식적인 가치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새삼 개인의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돌이켜보게 되는구나.
우리 모두 저마다의 행복을 주장하고, 그래서 각자 행복해지자.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힘들고 어려운 사람, 나보다 조금 약한 사람과 더불어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자꾸나. 사회를 떠난 개인이 불가능한 명제라면, 일그러진 사회에서 온전하게 행복을 누리는 개인이라는 문장 또한 성립할 수 없지 않겠니. 네가 그런 더불어 사는 행복을 향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아빠는 언제나 응원하련다.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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