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Chic)는 많은 혼란을 야기하는 단어다. 방송매체에선 이 단어를 모든 새로운 상품과 트렌드에 갖다 붙인다. 18세기 독일어 Schick에서 시작된 이 말의 뜻은 ‘질서 있게 배열하다’란 의미다. 여기에서 확장되면서 ‘스타일을 만드는 기술’이란 의미로 사전에 등재된 것이 1856년이다. 어찌되었건 이 단어는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 내부의 흐름, 분위기를 범용으로 지칭하기에 참 좋다는 점.
요즘 내가 한국사회에서 주의 깊게 읽어내려는 패션 코드는 ‘노년’ 이다. 자신의 멋을 찾으려는 노년 세대의 스타일, 시니어 시크(Senior Chic)다. 연장된 삶을 맞이하는 인구가 늘었다. 2050년에는 60세 이상 인구가 현재 8억 4,100만 명에서 20억 명으로 크게 늘 것이라는 세계보건기구의 전망은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가 2040년에 32.3%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리란 전망을 뒷받침해준다. 사회 내 인구구성의 변화는 노년에 대한 정의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는 평균수명이 의학 발전과 식습관 변화, 생활 습관 변화, 교육의 증가를 통해 연장되어 앞으로는 60대를 중년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구조성비율이 변화함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시니어 계층을 지칭하는 신조어도 속속 등장했다. 자식들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던 전통적 개념의 노인상을 거부하고 자신의 인생을 추구하려는 신세대 노년층을 통크족(TONK: two only, no kids)으로, 전래의 어머니상을 버리고 자신의 삶에 투자하는 중년여성을 루비족(RUBY: refresh, uncommon, beautiful, young)이라고 부른단다.
미국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매리 매카시가 쓴 ‘가톨릭 학교에서 보낸 소녀시절’에는 고아가 된 자신을 길러준 외할머니에 대한 단상이 나온다. 화려한 꽃무늬를 비롯해 반짝이옷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할머니의 옷장에 대해 ‘할머니의 외로움엔 화려함이 뒤섞여있었다. 그녀의 옷장과 화장대는 그녀의 고립감을 강조라도 하듯, 더욱 화려해졌다. 노인들이 젊어 보이려 안달하는 건 어디서든 보는 일이건만, 유독 할머니의 경우는 기괴하고 슬펐다. 마치 고집스레 퍼레이드를 펼쳐 보이겠다며 한껏 차려 입은 은둔자 같아서였다’라고 썼다.
1958년에 나온 회고록이지만, 노년여성의 옷차림과 꾸밈에 대한 생각이 변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이 변화의 조짐과 흐름이 내겐 감사하다. 시니어 시크란 그저 노년의 패션 스타일링을 칭하는 말이 아니다. 시크란 단어를 덧붙이려면 그 대상이 되는 존재의 구체적 생활방식과 선별된 취향이 녹아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을 후세를 위한 롤 모델로 만들 수 있을 때 시니어 시크는 만들어진다.
최근 패션계에서는 시니어 시장을 염두에 두고 기존의 소비자를 구획하는 틀을 바꾸고 있다. 패션 관련 뉴스 플랫폼을 돌아다니다 보면 전 연령(All Age)을 위한 옷차림이 소개된다. 국내 패션 브랜드 중에는 ‘연령 경계를 넘어’를 테마로 시니어 계층을 위해 특화된 디자인과 소재의 옷을 선보이는 곳도 생겼다. 시니어 모델들이 각종 매체에 등장하면서 사회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오랜 세월 쌓은 이미지와 커리어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최근 패션잡지 보그의 대표 스타일리스트 그레이스 코딩턴이 물러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편집장이었던 안나 윈투어와 함께 보그란 함선을 이끌어온 그녀. 74살의 나이에도 매체 외부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그녀. 젊은 날 주목 받는 패션모델로 이력을 시작했으나, 교통사고로 잡지사에 들어와 오늘날 미국판 보그를 굴지의 위상 위에 올려놓는 데 한 몫을 했다. 그녀가 만든 화보에는 트렌드 대신 스토리가 담긴다. 시니어 시크가 좋은 이유는 특정한 트렌드에 구속되지 않는 ‘세월을 관통하는’ 미감으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의 본질을 말해줄 수 있어서다. 시크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증언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꾸밈과 옷차림의 문법을 그들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시크하라, 나의 앙코르 인생이여!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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