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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페르시아의 후예

입력
2016.02.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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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뒤 미국의 대외정책이 바뀌면서 독재정권이던 한국과 이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카터 정부가 인권 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정책으로 압박하자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인사를 석방하면서 미군 철수를 저지했다. 이후 한국에서는 반정부 투쟁이 거세졌고 1979년 YH사건, 김영삼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란혁명으로 제2 석유파동이 발생하자 경제도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됐다. 결국 그해 10월26일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다.

▦ 카터 정부는 독재로 고통 받는 국가에 정치ㆍ외교 압박을 가하면서 국민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도록 했고, 이란의 팔레비 정부도 이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란에서는 반정부 단체가 연합해 가열찬 투쟁을 시작했다. 1978년 11월 팔레비 왕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를 계기로 더욱 많은 이란 국민이 반정부 투쟁에 가담했다. 1979년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고, 해외에서 혁명을 지휘했던 반정부 지도자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돌아온다.

▦ 혁명에 성공한 이란은 종교지도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철저한 종교국가로 탈바꿈한다. 이때부터 사실상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된다. 그 해 11월 이란 대학생들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인 90명을 인질로 잡았다. 미국이 팔레비 왕을 이란에 귀국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이때 미국은 이란 자산 동결 등 전면적 경제제재 조치를 단행하는 한편 군사작전까지 감행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에게 패한 카터가 퇴임하는 날 아침 이란은 인질을 석방했다. 사태 발생 444일 만이었다.

▦ 1962년 수교 이래 우리나라는 이란과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를 상징하는 게 1977년 명명된 ‘테헤란로’다.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 이란이 홀로 우리나라에 석유를 공급해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다. 물론 테헤란에도 ‘서울로’가 있다. 이란에서는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와 가전제품, 자동차가 인기를 끈다. 37년 만에 국제무대에 복귀한 이란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가 크다. 인구가 8,000만이 넘고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매장량도 많다. 사회간접자본(SOC)이 부족해 개발 여지도 크다. 우리도 이란을 향해 한시바삐 뛰어야 할 때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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