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북한은 한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최고권력자의 고모부이자 정권의 2인자였던 장성택이 군인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나가는 장면이었다. 북한은 반혁명 혐의로 장성택을 처형했다고 밝히면서 혐의를 시인한 진술도 함께 공개했다. “일정 시기에 가서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 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했다. 내가 총리가 된 다음에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명목으로 확보한 막대한 자금으로 일정하게 생활문제를 풀어주면 인민들과 군대는 나의 만세를 부를 것이며 정변은 순조롭게 성사될 것으로 타산했다.”
김대중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제1차장과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역임했던 라종일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가 장성택의 모든 것을 담은 ‘장성택의 길’(알마)을 내놨다. 처형 2년이 지난 지금, 장성택을 기억하는 책을 낸 이유는 장성택이 ‘북한식 개혁ㆍ개방’의 상징 인물이어서다.
저자는 김정일 사망 뒤 김정은 정권의 향배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무렵, 장성택이 해외로 도주해 ‘반북한 망명정부’라도 세우길 기대했다고 밝혔다. 주변에서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했지만 이는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래야지만 장성택 본인의 신변 안전뿐 아니라 “역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와 생각이 다른 이들은 독재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뿐더러, 손에 쥔 권력의 크기가 클수록 오히려 가장 처참하게 제거당할 수 밖에 없어서다.
장성택은 일제 말 이북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집안 출신이다. 김일성의 만주투쟁만이 유일한 정통성으로 인정되던 북한에선 마뜩잖은 배경이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자기 딸 김경희와의 결혼을 무산시키려 했으나, 김정일의 조정으로 성사됐다. 이후 장성택은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한다. “김정일의 마음을 읽고 김정일이 스스로 지시하기는 어려운 일들을 앞장 서 처리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식적인 권력주와 권력자의 사적인 영역 사이를 연결해주는 일이다.” 널리 알려진 기쁨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장성택은 늘 가슴앓이를 했다. 북한 인민들의 고난 때문이다. 장성택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은 한결 같다. 장성택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고위층과 달리 일반 인민들의 세세한 부분들을 신경 써주는 태도였다. ‘1번 동지’ ‘나와 다니는 장군님’ 같은 호칭도 이 때문에 생겼다. 현장을 일일이 둘러보고 현실을 모르는 무리한 지시가 내려왔을 때 이를 적당하게 제어하는 것이 장성택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경제의 파탄은 한계를 넘어섰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스승이던 황장엽이 파탄 난 북한 경제를 걱정하자 “이미 파탄 났는데 어떻게 더 파탄 나겠느냐”고 되받았다. 1990년대 후반 장성택은 술에 취하기만 하면 “인민들이 너무 많이 죽어가고 있다. 왜 우리는 중국처럼 못하는가. 위에서 한 번만 결정하며 되는 것을”이라고 한탄했다.
김정은의 등장은 이런 장성택에게 기회였다. 김정은을 통해 “천천히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행운도 따랐다. 자신을 방해할 당내 원로들, 리용철ㆍ리제강 등 강경파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것이 함정이었다. 일찍이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정권을 물려주기 전 측근 10여명을 불러 은제 권총을 나눠주면서 “주체사상에서 벗어나면 쏘아 죽이라”했다. 김정일도 3대 세습은 무리라는 생각에 한때 일본식 천황제처럼 김씨 일가는 군림만하고 정치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결국 세습으로 방향을 틀었다. 집권 초 일일이 장성택에게 자문을 구하던 김정은은 결국 장성택을 잔인하게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 장성택이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 본 상황이, 실제로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절대 권력은 속성상 그러했다.
라 교수는 “특수한 상황 아래 특별한 처지에서 살다 특이한 생애를 비참하게 끝낸, 한 몸을 담을 무덤조차 없이 죽어간 사람을 이야기로 남기고 싶었다”고 밝혔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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