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필이가 얼마나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습니까, (사건 발생 당시) 판결도 어이가 없었고요. 고인만 억울하게 된 유례 없는 사건이었으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요. 늦었지만 결과가 그나마 좋아 다행입니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영영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애초에 범인을 잘못 짚은 검찰은 진범의 해외도피를 막지 못했고, 국내 송환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19년 만에 진범을 심판대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2009)으로 재수사 여론 형성에 불을 댕긴 홍기선(61) 감독의 공이 크다. 홍 감독은 31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지난달 29일 아더 존 패터슨(37)에게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이 선고된 데에 안도를 표했다.
홍 감독은 애당초 이 사건을 잘 알지 못했다. 2003년 영화 ‘선택’을 연출한 뒤 차기작으로 미군에 대한 영화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사건을 자세히 다룬 인터넷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미 오래 전 활동이 중지된 사이트”였지만 홍 감독은 곧 빠져들었다. “미군의 문화, 그들의 인식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사건 장소가 묘하게도 (미군이 자주 드나드는) 이태원이고 미군 문화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소재였다”고 그는 말했다. 피해자 조씨의 어머니 이복수(74)씨를 만나 영화화를 타진할 때는 조심스럽기만 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잊힌 상처를 건드려서 유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아닌가 했죠.” 아니나 다를까 조씨의 누나들은 반대했다. 하지만 어머니 이씨에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묻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의 방을 생전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어머니 이씨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달라며 오히려 적극적이었다”고 홍 감독은 회고했다.
홍 감독이 어렵사리 마련한 제작비 5억5,000만원으로 기획한 지 5년 만인 2009년 9월 영화를 개봉했을 때만 해도 진짜 범인을 찾아 재판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적었다. 애초에 살해범으로 기소된 에드워드 리(37)가 1998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된 후 담당 검사가 출국정지 연장을 깜박해 패터슨이 미국으로 도주한 지 오래였다. 조씨 가족들은 사립탐정까지 고용했지만 패터슨의 행방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담당 검사를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한 것도 무혐의 처분으로 끝났다. 이렇게 사건은 영영 잊혀지는 듯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진실 파악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관객 53만7,075명) 수사 재개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급기야 그 해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미 법무부에 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지 않느냐”며 법무부 장관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법무부는 두 달 전인 2009년 10월 미국 법무부로부터 패터슨이 미국 법원에서 재판 받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도 범죄인 인도 요청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지난해 9월 패터슨은 도주 16년 만에 한국으로 송환됐고, 뒤늦은 정의가 실현될 수 있었다.
사건을 맡은 박 검사(정진영)의 시각에서 실체에 접근하는 영화는 리와 패터슨이 공범일 가능성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홍 감독은 “오랫동안 여러 자료를 검토해보니 조씨를 살해한 사람은 패터슨이라는데 심증이 갔다”며 “결론을 명확히 낼 수는 없었으나 둘 중 한 명이 분명 칼을 휘둘렀고 한 명은 공범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1심 법원이 리를) 공범으로 판단한 것도 잘한 일”이라고 했다.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에서 활동하며 1980년대 대학가 영화운동의 중심에 섰던 홍 감독은 주로 사회의 낮고 어두운 곳에 카메라를 비추어 왔다. 장편데뷔작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로 인권 사각지대인 새우잡이 배의 노동 착취를 고발했고, ‘선택’(2003)으로는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씨의 신산한 삶을 돌아봤다. 그는 “군납 비리와 관련한 군대 내부고발자에 대한 영화를 6년째 준비 중”이라며 “올해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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