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충분한 식량 생산에도
영양 결핍자 수 10억명 넘어
대규모 농업과 자유무역 시스템으로
소농ㆍ개도국 빈민에 환경까지 희생
열량만 강조하는 ‘음식의 연료화’
건강은 물론 문화ㆍ전통마저 사라져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
마이클 캐롤런 지음ㆍ배현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456쪽ㆍ2만5,000원
2003년 9월 세계무역기구(WTO) 회담이 열리고 있던 멕시코 칸쿤에서 한국 농민 이경해씨가 자살했다. 경찰들이 세운 바리케이드 꼭대기에 선 그는 한 손에 ‘WTO가 농민을 죽인다’는 팻말을 들고 다른 손으로 칼을 꺼내 자기 가슴을 찔렀다. 그의 죽음에 방글라데시, 칠레, 멕시코 등 전세계 소농이 일어나 ‘우리 모두가 이경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현행 식품 체계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식량 안보는 21세기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세계 농업이 매일 전 인류에게 최소 2,720㎈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양을 생산한다고 계산했다. 이 수치는 식량 안보 전략이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란 증거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묘하게 뒤틀려 있다. 같은 기구에서는 2009년 한 해 동안 세계의 영양결핍자 수가 10억 2,000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연구에 따르면 세계 인구 23% 이상이 과체중, 10% 이상이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전 인류를 든든하게 먹이기 위해 농업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값싼 먹거리를 대량 생산한 결과, 비만과 기아가 동시에 발생하고 전세계 소농들은 죽어나가고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사회학과 교수인 마이클 캐롤런에 따르면 전지구적으로 진행 중인 저가 식품 체계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는 신간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에서 우리가 싼값에 음식을 소비할 수 있는 이유가 현행 식품 체계의 비정상성에 있다고 주장하며, 싼 음식의 가격표 뒤에 가려진 개인과 집단의 희생을 밝혀낸다.
저가 식품 체계를 지지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싼 값에 음식을 소비할 수 있도록 식량을 대량으로 생산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노동 집약적이고 비효율적인 전통적 소규모 농업은 적합하지 않으며, 품종 개량ㆍ유전자 조작 등 첨단기술을 동원한 산업화된 대규모 농업방식이 필요하다. 비농업 인구가 급증하는 현대에 이런 주장은 아무런 오류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캐롤런은 음식을 바라보는 자세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식품을 열량과 동일시하는 태도다.
“세계 열량 생산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냐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매일 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드는 현실을 두고 보자면 말이다. 그러나 충분한 열량만으로는 건강한 육체를 이룰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기아-비만의 역설에 비추어 보면 확실한 사실이다.”
열량 개념이 처음 나온 것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다. 현지에선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한 반면 미국에서는 식량 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식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서기보다는, 수량화가 가능한 척도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콩나물무침과 제육볶음 중 무엇이 더 인류에게 필요한 음식인가라는 까다로운 질문 앞에 열량 개념은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쾌함은 음식을 연료 개념으로 평가절하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칼로리의 세계에서 과일과 엽채류는 육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1920년대 일본 제국은 ‘비용은 줄이고 열량은 높이는’ 서구식 요리로 육군과 해군의 급식을 개혁했다. 유서 깊은 채소 식단을 고기, 밀가루, 튀김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는 건강뿐 아니라 음식의 다른 중요한 요소, 문화와 전통까지 내다버리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음식을 에너지 매개체로 보는 인식 외에도 자유무역시스템의 필연적 불공정성을 지적하며 저가 식품체계가 소농, 개도국의 빈곤층, 환경, 미래세대까지 희생시킨다고 주장한다. 두려운 것은 음식이 단순한 연료가 아닌, 기분을 고양하고 소통을 촉진시키며 전통을 계승하는 사회적 유기물이라는 걸 우리가 잘 알면서도 저가 음식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반값 세일’ 딱지를 붙이고 나온 고기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값싼 음식은 실제론 결코 싸지 않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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