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왜 독일처럼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비판하고 반성하지 않나 궁금해요.”
독일에서 온 파란 눈의 젊은 여성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질문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답했다. 대학 시절 시청했던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잊지 못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기 위해 8,600㎞를 날아 서울까지 왔다는 엘리자베스 바글러(21ㆍ여)씨.
27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정기 수요시위 직후 만난 바글러씨는 “열네 살 소녀들이 당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믿을 수가 없다. 일본 정부는 역사를 무시하는 걸로 보인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독일 튀빙겐대에서 한국학을 전공할 때 처음 위안부 문제를 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3월 고려대에 교환학생으로 와 한국 정치, 경제를 공부하다 12월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 인턴으로 일하면서 동료들과 수요시위에도 참석하기 시작했다. “함께 다큐멘터리를 보던 친구들 대부분이 눈물을 흘렸어요. 위안부는 민족 문제를 떠나 전쟁 피해자인 여성들에 대한 문제죠. 일본 정부는 책임을 느끼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존중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위안부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 옆에 세 번째로 선 이날 바글러씨는 수요시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전세계 여성들이 할머니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외쳤다. 서툰 한국어로 말을 잇는 그에게 참석자 1,000여 명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여성’이란 단어에 유독 힘을 준 그가 한국 여성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어머니 덕분이기도 하다. 평범한 독일 여성인 어머니는 평생 간호사로 일했고, 그 때 만난 한국 동료 이야기를 어린 딸에게 들려주곤 했다. 바글러씨는 “어릴 적 엄마가 이국적인 친구 이름을 말하면서 ‘면 샐러드를 잘 만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잡채였다”며 웃었다.
그렇게 파독간호사 얘기를 듣고 자란 바글러씨는 고교 시절 한국 역사 드라마에 푹 빠졌다. 대학 때는 본격적으로 한국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 뮌헨에서 200㎞ 떨어진 튀빙겐으로 진학했다. 3학기 만에 한국으로 날아 와 지난 1년 공부를 마친 그는 “아름다운 전통 건물들을 보며 한국 역사를 배울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고 밝혔다.
독일과 한국의 닮은 점을 묻자 바글러씨는 단번에 “수요시위에서 만난 중ㆍ고등학생들”이라고 답했다. 바글러씨는 우선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라도 계속 기억하도록 노력하는 게 독일 교육”이라며 “학창 시절 역사ㆍ정치ㆍ종교 수업 속에서 항상 나치 문제를 논했고, 현장을 중시하는 독일 교육제도 때문에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수용소 등을 직접 찾아가 역사를 배웠다”라고 설명했다. 수요시위 현장에 오는 학생들을 보며 자신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는 그는 “요즘 독일 청년들이 (극우인종주의 단체) 페기다(PEGIDA)를 저지하려는 것처럼 한국 학생들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할머니들의 기억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집회 후 바글러씨를 만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사랑밖에 줄 것이 없다”며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바글러씨는 “독일로 돌아가기까지 일주일 남았는데 광주 나눔의 집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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