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고 집에 왔더니 모든 게 낯설었다. 읽다가 펼쳐둔 책들. 나뒹구는 음반 재킷과 옷가지들. 설거지통에 담긴 그릇들과 재떨이마저 나 아닌 타인의 흔적 같았다. 사물뿐 아니라 한동안 곱씹던 문제들이나 해결 안 된 감정마저 공기 중에 만져지지 않는 화석으로 부유했다. 가라앉던 병증이 다시 도지는 기분도 들었으나 그만큼 다시 떨치고 많은 걸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렇게 정돈을 끝내고 차를 한잔 마셨다. 잔을 쥐는 느낌이 왠지 이전과는 달랐다. 며칠 새 더 가늘어진 손가락과 말끔히 때를 벗겨낸 잔 손잡이가 낯선 조응을 하는 느낌이었다. 이 흔해빠지고 오래된 찻잔이 새로 만난 친구 같았다. 오랜 관성 속에 찌들고 익숙해져 숫제 서로에게 없는 존재가 돼버린 것처럼 자각 없던 것들이 불쑥 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익숙함은 참 편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닫혀 버린 영혼의 숨은 감각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외골수로 속단하게 만드는가. 으레 그런 것이겠거니, 확인 안 해도 다 아는 것이겠거니 하면서 눙쳐버리고 단정해버리는 것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몸의 병증으로 전이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양손으로 찻잔을 꼭 움켜쥐었다. 돌봐주지 않고 방기했던 많은 문제들이 거기 담겨있기라도 하는 듯 찻잎들의 미세한 꿈틀거림을 주시했다. 플라스크에 담긴, 다시 생성된 영혼의 주름 같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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