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를 ‘맛있게’ 만드는 어머니의 손맛
“통닭 먹고 싶다.”
이틀 만에 의식이 돌아온 형 병철 씨가 뱉은 첫 마디였다. 형의 말에 동생 명철 씨가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섰다.
“형, 괜찮나? 인자 의식이 돌아온 기가?”
병철 씨는 그런 동생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알겠다. 통닭 시킬게. 순살로 퍼뜩 가오라고 할게!”
병철 씨는 동생이 나간 후에야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링거액 냄새가 퍼지는 중환자실 한켠이었다. “어라, 여기가 어디지?” 아무리 봐도 내시경을 받으러 들어올 때 본 병실 풍경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속이 안 좋았다. 급기야 배탈이 났다. 장염인 것 같았다. 병철 씨는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병상에 눕자 간호사가 수면 마취를 시작했다. 마취 액이 서서히 몸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하더니,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부정맥이었다. ‘어, 왜 이래? 심장이 왜 이렇게 제 멋대로 뛰는 거지?’ 병철 씨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어요. 지난 몇 년간 몸을 너무 혹사했어요. 2년 남짓 몸무게가 10kg나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병철 씨는 동생과 함께 수성시장 한켠에서 15평짜리 고깃집을 운영했다. ‘사장님’이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마트에 어묵배달을 했다. 배달 일이 끝나면 곧장 고깃집으로 달려갔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명철 씨는 PC방에 과자와 음료수를 납품하는 일을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을 했다. 납품 일을 마치면 곧장 본업인 고깃집으로 향했다. 형제 모두 하루 3시간 이상 푹 자본 날이 없었다. ‘꿀잠’은 사치였다.
명철 씨가 통닭을 사 들고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나는 형이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
의사는 부정맥 쇼크라고 했다. 작은 병원에서 내시경을 하다가 병철 씨가 의식을 잃었고, 앰뷸런스에 실려 경북대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체력이 너무 약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이 또렷해진 후 병철 씨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어머니 이야기였다.
“엄마한테 이야기했나? 이야기하지 마라.”
병철 씨는 눈시울이 붉어진 동생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당부했다. 명철 씨는 목에 메이는 듯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에게 이런 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혼자 세 남매를 키워온 어머니였다. 좋은 소식만 들려드리고 싶었다.
- 어머니가 부여잡은 가족의 ‘끈’
아버지는 술과 낚시를 좋아했다. 디스토마와 간경화 증세 때문에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다. 1988년 여름, 다시 아버지의 배가 불러왔다. 복수가 차오른 거였다. 병원엘 갔더니 의사가 “종합검사 한 번 해 보자”고 했다.
의사의 말에 아버지는 입원을 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술도 끊고, 회도 안 먹고 건강관리를 좀 더 철저히 해야겠단 생각이 전부였다. 그런데 검사 하루 전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느닷없는 장례를 준비하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1988년, 형 병철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동생 명철 씨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을 옮겼다. 아파트에서 반 지하 단칸방으로. 돌계단을 7개 정도 걸어 내려가야 들어갈 수 있는, 창고를 개조해 만든 방이었다. 창문은 턱이 낮아서 비가 오면 집에 물이 들어왔다. 장마철에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제일 고생한 건 어머니였다. 30대 중반에 남편을 잃고 난 후 네 식구의 생계를 혼자 책임졌다. 바깥일을 해본 적 없었지만 요리에는 자신이 있었다. 동촌유원지에 새로 난 도로에 터를 잡고 포장마차를 열었다. 하지만 아직 공사 마무리가 덜 된 탓에 주변이 어수선했다. 요리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손님이 들 자리가 아니었다. 다 경험 미숙에서 온 실수였다. 어쩔 수 없이 몇 달 만에 포장마차를 걷었다.
이후 반월당에 있는 ‘민속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주방 일을 하셨다.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부침개 하나에 1000원, 소주 한 병에 500원이었다. 3~4천 원으로 나름 풍성한 술자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가 ‘민속골목’에서 일하던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바로 ‘야식’이었다. 야식하면 저녁 10시 이후에 먹는 군것질이지만, 형제의 야식은 다음날 새벽 3시였다.
“얘들아, 일어나라. 간식 먹자!”
어머니는 장사를 마치면 매일 집에 들어와 형제를 깨웠다. 일하시던 식당 2층에 작은 방이 있어서 거기서 자고 올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꼭 집에 오셨다. 손에는 늘 과자나 우유, 빵을 사왔다. 형 병철 씨는 “한창 곤하게 자는 시간이었지만 어머니가 깨우면 발딱 있어났다.”고 회상했다.
“잠이 덜 깼는데도 우유며 과자가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그렇게 새벽에 어머니 얼굴 한번 보고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다시 잠이 들었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끼리 오붓하게 놀러가거나 느긋하게 식사를 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단절된 느낌은 별로 안 들었어요. 아마 그 야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 인생 최대의 위기, 어머니가 내민 손길
형 병철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를 했다. 빨리 제대를 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군대도 일반 병이 아니라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하사로 지원했다.
단기하사로 지원했지만 느닷없이 잠수함으로 발령 명령이 떨어졌다. 9년 동안 장기복무를 해야 했다.
“잠수함 내부는 자연 산소가 아니라 인공산소를 채웁니다. 체력소모가 많았죠. 땅을 밟으면 다리가 풀릴 정도였습니다. 햇빛을 못 보는 게 가장 괴로웠어요.”
체력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훨씬 윤택해졌다. 외국 순항 훈련에 참가하면 돈이 꽤 쏠쏠하게 나왔다. 성실한 성격 덕에 중사까지 순탄하게 올라갔다. 나름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잘 밟아오고 있었다.
잘 나가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군생활 9년 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역을 해야 했다. 친척의 사업에 돈을 투자한 것이 화근이었다. 사업이 워낙 잘 되고 있어서 본인의 적금과 카드, 대출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결국 쓴잔을 마셔야 했다. 그 친척도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잠수함 교육 양성소에서 교관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월급을 차압당했다. 훈련 교관으로서, 또 남자로서 자존심에 금이 갔다. ‘엘리트 중사’와 ‘신용불량자’는 양립할 수 없는 단어였다. 2002년, 병철 씨는 결국 전역 신청서를 냈다.
그 즈음 어머니는 갓바위로 인근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었다. 병철 씨가 제대하고 얼마 안 있어 “같이 장사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때는 어머니가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장사를 제의한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게 제일 좋다’는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의 손맛과 두 아들의 성실성을 잘 버무리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거란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머니는 팔공산에서 내려왔고, 두 아들은 하던 일을 접었다. 형제는 ‘어머니만 믿고’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구미에서 해물탕집을 인수했다. 세모자가 처음으로 경영한 식당이었다.
식당 인수 후에 세 모자는 모두 당황했다.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이었다. 구미의 독특한 문화 때문이었다.
구미는 혈연과 지연이 강한 지역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형 병철 씨가 특공대로 나섰다. 다양한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인맥을 쌓는 수밖에 없었다. 수영, 족구는 물론이고 주말엔 성당에까지 나갔다. 그렇게 부지런히 취미활동을 펼치자 손님이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다.
해물탕집 운영과 함께 새로운 업종 진출도 모색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동생 명철 씨가 앞장섰다. 처남의 소개로 식육점 일을 배웠다. 명철 씨는 방촌과 내당동을 오가며 하루 꼬박 12시간을 일했다. 구미를 떠나 ‘파견근무’를 한 셈이었다.
“6개월쯤 지나고 나니까 사장님이 가게를 비우더라고요. 제가 일을 얼추 다 해내니까 가게 일을 다 맡기고 취미 활동을 즐겼어요. 낚시를 좋아했거든요. 발골부터 판매까지 정육점을 혼자 도맡아 경영한 셈이죠. 고기는 원 없이 만졌습니다.”
1년이 지나자 손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예전엔 그저 고기는 고기였지만, 손에 육질이 느껴졌다. 본인도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돼지도 물돼지와 찰돼지가 있어요. 찰돼지가 맛있는 돼지죠. 손으로 만져보면 100%였습니다. 혀보다 더 정확했죠. 이젠 됐다 싶더라구요.”
형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병철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통할 것 같다. 고깃집 시작하자.”
- “그 가게는 들어오면 망하는 자리”
형제가 문을 연 곳은 대구 수성구에 있는 수성 시장 한켠이었다. 돈이 없어서 대로변이 아닌 시장 깊숙한 곳에 터를 잡았다. 테이블 8개 정도가 꽉 차는 작은 고깃집이었다.
형제가 고깃집에 올인을 하자 구미 해물탕집의 매출이 떨어졌다. ‘영업 이사’를 맡았던 병철 씨의 부재 때문이었다. 해물탕집에 매달렸으면 현상유지는 했겠지만 형제는 과감하게 모험을 선택했다. 형제 모두 투잡을 뛰면서 고깃집에 더욱 매진했다.
“잘 못했지만 열심히 했어요. 특히 동생이 고생이 많았죠. 양념장도 동생이 개발했거든요. 손님들한테 정말 타박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고기가 가장 맛있게 구워지는 철판을 찾는 과정도 지난했다. 다양한 철판을 구해와 고기를 굽는 실험을 했다. 오랜 연구 끝에 엷은 불판이 최고라는 결론을 얻었다.
“두꺼운 불판은 달궈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기가 잘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 수 없어요. 다 익으면 불판이 천천히 식기 때문에 고기가 금방 타버리기 일쑤구요. 그에 비해 얇은 불판은 온도가 빨리 오르기 때문에 고기를 굽는데 제격입니다.”
빡빡이는 지금까지도 얇은 가스용 불판을 쓴다.
고기의 두께도 중요하다. 동생 명철 씨는 “삼겹살 두께가 6~7mm일 때 최고의 맛이 난다”고 일급비밀을 공개했다.
가장 든든한 지원군은 어머니였다. “반찬이 맛이 없다. 중국산 김치는 별로다.”는 손님들의 민원(?)이 많아서 어머니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밑반찬과 김치를 어머니가 담당했다. 어머니가 손을 걷어붙이자 손님들 사이에서 곧장 “김치 맛 너무 좋다. 밑반찬 하나는 끝내준다.”는 칭찬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아등바등 최고의 맛을 위해 노력하는 사이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 망한다”며 독설을 하던 손님이 “조만간에 대박날 것”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형제는 입을 모아 “독설을 들을 때는 쓴물을 삼켰지만 그런 혹독한 평가가 있었기에 오늘의 빡빡이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어머니가 정의한 ‘빡빡이’의 진짜 의미는?
2년 반쯤이 지난 후 다시 새로운 터전을 찾았다. 고깃집 규모가 작아서 아무리 손님이 북적대도 더 이상 매출이 오르지 않았다. 확장이 필요한 시기였다.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상의를 드렸다.
“어차피 해물탕집도 잘 안 된다. 구미는 인맥 없으면 안 되겠다. 세 모자가 똘똘 뭉쳐서 한번 해보자.”
두 식당을 동시에 내 놓았고, 신천 시장 부근에 새로운 식당을 얻었다.
이 대목에서 형과 동생 사이에 이견이 생겼다. 상호에 대한 것이었다. 동생 명철 씨가 제안한 상호는 ‘빡빡이’였다. 형은 반대했다.
“장난처럼 느껴지더라구요. 동생이 고등학교 때부터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긴 했지만, 상호를 그렇게 짓는 건 뭣하단 생각이 강했습니다.”
명철 씨는 자기 생각을 강하게 주장했다.
“제가 빡빡머리에 애착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광고효과도 만만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빡빡이란 상호가 외우기 쉽잖아요. 제가 가게 한켠에 자리를 잡고 고기를 썰 텐데, 빡빡이란 가게에 들어와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이 고기를 썰고 있으면 가게 이름이 금세 머리에 박힐 것 아닙니까. 처음으로 형한테 반항했죠.”
형제의 의견 대립이 너무 팽팽했다. 이때 잠자코 있던 어머니가 해결사로 나섰다.
“가게에 손님이 빡빡하게 들어찬다는 뜻도 되겠네.”
하고 보니 그랬다. 형제는 어머니의 ‘판결’을 수용했고, 간판을 빡빡이로 내걸었다.
음식은 자신 있었다. 몇 년에 걸쳐 연구한 찰돼지 선별법, 최적의 불판,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어머니의 손맛까지 더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반 년 정도는 몸 풀기였다. 당시 빡빡이 맞은편의 치킨 집은 언제나 성황이었다. 식당 입구가 무안하리만큼 치킨 집 앞은 언제나 손님들이 줄을 섰고 빡빡이에는 휑하니 바람만 불었다. 그러나 2년이 넘어가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빡빡이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명절에도 문을 닫을 수 없을 만큼 단골들이 많이 늘었다.
빡빡이는 문을 연 뒤로 지금까지 한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어머니 모시고 가족 여행을 다녀온 적이 꼭 한번 있는데 그때도 형과 동생, 형수와 제수씨가 돌아가면서 가게를 지켰다. 로테이션 가족여행이었던 셈이다.
- 30년 단골, 어머니 손맛의 힘
빡빡이의 최고 자랑은 단골이다. 수성시장 시절 고기 맛을 인정해줬던 손님들도 발길을 끊지 않고 빡빡이로 그대로 왔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손님들도 있었다. 바로 어머니의 손님들이었다. 형 병철 씨는 “빡빡이에 어머니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증거”라고 밝혔다.
“어머니가 반월당 민속골목에서 일하실 때 얼굴을 익힌 손님들도 빡빡이로 와요. 간판엔 동생얼굴이 걸렸고, 홀엔 주로 제가 나가 있는데도 어떻게 알고 찾아오시더라고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던 이들이 어머니 손맛을 못 잊어서 40대 중년이 되어서 찾아오는 거니까, 어머니의 손맛에 중독성이 있다고 봐야죠. 신천시장에서 ‘마약 떡볶이’가 탄생했는데, 우리 빡빡이는 ‘마약 밑반찬’입니다. 30년 단골을 만든 건 오로지 어머니의 손맛과 후덕한 인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신천주유소 옆에 문을 연 첫 빡빡이 가게는 일곱 번이나 망한 자리였다. 빡빡이가 문을 열 때 인근 주민들은 “인테리어 하는 사람들만 돈 버네. 이번에는 얼마나 버틸까.”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형 병철 씨는 “심지어 동네 주민 중에 ‘이 자린 원래 안 되는 자리야. 음식 맛이 어떻든 상관없어’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편견을 뒤집고 성공한 것이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잖아요. 정성이면 안 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저, 동생, 그리고 우리 가족을 응원해주는 30년 단골, 수성시장 단골들이 지금의 빡빡이를 만들었습니다.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하나둘 모이면 ‘운명’도 바꿀 수 있단 확신이 들었어요.”
얼마 전에 다시 가게를 옮겼다. 원래 자리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이다. 가게를 옮기고 나서 매출이 40% 상승했다. 홀이 넓어진 덕이었다.
“가게를 옮길 때도 어머니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제 막 자리를 잡았는데 홀 분위기와 위치가 바뀌면 사람들이 찾아올까, 하는 걱정이 많았죠. 그러자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손맛은 마음 맛이고, 맛이 통하면 마음도 통한다’고 하시더군요.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죠. 용기가 솟더군요.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죠.”
- 어머니의 30년 여정, 그 결실이 ‘빡빡이’
형 병철 씨는 “어머니의 30년 단골 비결에 대해서 귀띔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람을 좋아하세요. 누구라도 허투루 대하지 않아요. 진심으로, 정성으로 대하죠.”
구미에서 해물탕을 할 때였다. 별명이 ‘장미’라는 중년 여자가 매일같이 찾아왔다. 기름으로 떡진 머리에 몇 달은 안 갈아입은 듯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비주얼뿐 아니라 퀴퀴한 냄새도 사람을 질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장미’씨가 오면 늘 식당 뒤에 상을 펴고 점심을 차려줬다.
“꼭 한창 바쁠 때 찾아왔죠. 손님 받기도 벅찰 시간에요. 밥상도 대강 차려주면 먹질 않아요. 항상 갓 지은 밥에 된장찌개, 그리고 계란프라이를 올려줘야 숟가락을 들었죠. 어머닌 그 바쁜 시간에도 늘 밥을 먹여서 보냈죠.”
언젠가 어머니가 ‘장미’ 씨가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자기 엄마 살아 있을 때, 꼭 저렇게 밥을 지어줬던 모양이더라. 장미 어머닌 딸이 죽을 때까지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을 거다. 모자란 딸 놔두고 먼저 갈 땐 눈도 편히 못 감았을 거야.”
어머니는 그렇게 구미에서 가게를 한 3년 동안 꼬박꼬박 따뜻한 밥을 지어 먹였다.
사람 챙기는 습관은 대구에서도 여전하다. 가게에 박스가 생기면 절대 버리지 않는다. 차곡차곡 모아줬다가 박스 줍는 할머니들에게 준다. 형제는 “박스 때문에 창고가 비좁아진다.”고 푸념을 하지만 어머니는 들은 척도 안 한다. 형 병철 씨는 “불평은 하지만 박스를 받아들고 좋아하시는 할머니들 보면 또 마음이 풀린다.”고 했다.
사람 귀하게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은 형제들에게도 대물림되고 있다. 형제가 꿈꾸는 ‘빡빡이’의 미래에 어머니의 사회관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형 병철 씨는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사장 직원이 아니라 모두 동업자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빡빡이 축산’이라는 법인을 만들어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지분을 나누어 가질 계획입니다. 우리 형제뿐 아니라 ‘빡빡이’ 구성원 전체가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공동 사업자가 되는 거죠. 빡빡이의 미래는 한 마디로 ‘우리 모두의 빡빡이’입니다.”
현재 빡빡이는 대구에 체인점 5군데를 열었다. 고기는 동생 명철 씨가 철저하게 관리한다. 본점 못지않게 지점들도 대박을 치고 있다. 간판만 달아주고 마는 여느 체인과는 수준이 다른 관리 덕분이다.
“빡빡이의 성공 비결을 묻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어머니의 마음’라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손맛도 손맛이지만, 무슨 일을 하든 정성스럽게 하고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은 어느 분야 누구에게라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빡빡이를 반석에 올린 정신적인 힘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그 정성 하나로 우리 세 남매 키우시고 지금의 빡빡이도 일구어내셨습니다. 어머니가 우리 집안의 기둥입니다. 앞으로도 어머니와 함께 오래 오래 장사하면서 행복한 일상을 꾸리고 싶습니다.” *
정리ㆍ사진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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