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로 촬영한 영미합작 ‘캐롤’
2차례 필름 특별상영회 모두 매진
타란티노의 70㎜ 영화 ‘헤이트풀8’
국내선 디지털로 상영돼 팬들 불만
일부 감독 필름의 깊이에 촬영 고수
관객들은 “특별한 경험” 여겨 인기
내달 4일 개봉하는 영국-미국 합작영화 ‘캐롤’(감독 토드 헤인스)은 30, 31일 각 한차례씩 필름 특별상영회를 연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두 여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캐롤’은 당시의 시대상을 거친 질감으로 보여주기 위해 16㎜필름으로 촬영했고 해외에서는 필름과 디지털로 각각 상영됐다. 국내에선 극장 대부분이 디지털 상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필름으로 만나기 어려웠다. 수입사 더쿱과 배급사 CGV아트하우스가 필름 특별상영회를 열기로 해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그나마 마련됐다. 두 차례 특별상영회의 좌석(216석)은 예매 개시 1시간 만에 매진됐다. 수입사 등은 추가 상영회를 검토 중이다.
디지털 시대에 유물 취급을 받아온 필름이 여전히 극장가에서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디지털에 주류의 자리를 내놓았으나 열성 영화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유명 영화감독들이 필름으로 제작한 영화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고, 팬들이 이에 화답하며 디지털 시대에도 필름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고 있다.
대가들의 식을 줄 모르는 필름 사랑
지난 7일 개봉한 ‘헤이트풀8’(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은 70㎜필름으로 촬영했다. 필름으로 찍고 상영하는 게 일상이던 지난 세기에 70㎜필름은 주로 대작 영화용이었다.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이 단관극장이던 시절 70㎜ 영사기를 갖추고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을 상영해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타란티노 감독은 광활한 설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실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좀 더 심도있게 표현하기 위해 70㎜필름으로 촬영했다. 지독한 영화광으로 비디오가게 점원으로 일하다 영화계에 뛰어든 타란티노 감독의 고집이 작용했다. 지난달 25일 미국 극장 100곳에서 70㎜필름으로 첫 상영된 뒤 31일 디지털로 정식 개봉했다. 미국 연예주간지 할리우드리포터에 따르면 미국 배급사 TWC는 필름 상영을 위해 70㎜ 영사기 100대를 구입했다. 미국에 남아 있는 70㎜ 영사기는 200대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헤이트풀8’은 국내에서는 디지털로만 상영돼 일부 영화 팬들이 감독의 연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70㎜필름 상영을 대체해서 큰 스크린에서라도 이 영화를 보길 원하는 관객들이 많아지자 국내 최대 스크린으로 유명한 영등포CGV 스타리움관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한 영화인은 “70㎜필름 상영이 되지 않아 아쉬웠는데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니 화면이 훨씬 풍성한 느낌이었고 왜 타란티노가 70㎜필름 촬영을 고집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영화 보자” 열성 팬들 화답
대가들의 필름 사랑은 국내도 예외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2013)를 필름으로 촬영했을 때 국내 마지막 필름영화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곧잘 들었다. 하지만 지난해 독립영화계 스타인 장률 감독이 ‘필름시대사랑’의 일부를 16㎜필름으로 촬영하며 필름 촬영의 명맥을 이었다. ‘필름시대사랑’의 제작을 진행한 조현정 프로듀서는 “영화의 무거운 분위기에 맞춰 전체를 필름으로 촬영하려 했으나 여건상 불가능했다”며 “장 감독은 언젠가 디지털 촬영분까지 모두 35㎜필름으로 옮겨 필름 상영을 하고 싶어한다”고 밝혔다. 16㎜필름으로 촬영한 뒤 이를 폭이 더 넓은 35㎜필름에 옮겨 상영하면 필름의 입자가 거칠어지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디지털이 대세인 시대이다 보니 필름 촬영과 상영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필름을 쉽게 구하기 어렵고 후반 작업도 쉽지 않다. 필름 촬영을 경험한 스태프 확보도 간단치 않다. ‘캐롤’은 2회 특별상영회를 위해 700만원을 들여 상영용 필름을 따로 마련했다. 국내엔 필름에 한글 자막을 입히는 작업을 할 곳이 없어 영국 업체에 맡기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필름시대사랑’ 제작진은 국내서 유일하게 필름현상 장비를 갖춘 한 업체의 협조로 현상 작업을 겨우 마쳤다. 이 작품에 쓰인 슈퍼16㎜카메라는 촬영 뒤 박물관으로 직행했다.
예전과 다른 환경인데도 감독들은 디지털보다 더 깊이 있고 효과적인 화면을 만들어내는 필름을 외면할 수 없다. 조현정 프로듀서는 “특수효과를 활용해 필름 촬영과 비슷한 비주얼을 만들 수는 있으나 깊이는 필름을 흉내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영화광들은 필름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색감이 따로 있기에 필름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필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CGV아트하우스는 전국 상영관 22곳 중 21곳에 필름영사기를 갖추고 있다. 필름이 지닌 아날로그의 정감을 잊지 못하는 열성 영화 팬들의 반응도 무시할 수 없다. 고전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의 모은영 프로그래머는 “예전에는 화질이 떨어지는 필름 상영을 하면 싫어하는 반응이 꽤 있었으나 요즘은 영사기의 필름 돌아가는 소리만으로도 이색적인 경험을 한다고 여기는 관객들이 많다”고 전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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