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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인류학] 애착 잃은 산업화의 그늘, 우울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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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인류학] 애착 잃은 산업화의 그늘, 우울장애

입력
2016.01.25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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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500년전,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건강과 질병이 체액의 조화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생명이 정액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울증은 흑담즙, 즉 검은 쓸개즙이 과할 경우 발생한다. 이후 수천 년 동안 유럽의 의사들은 목욕이나 사혈, 하제 등 체액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우울증, 즉 멜랑콜리아를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멜랑콜리아(melancholia)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로 검은 담즙(melaina + chole)이란 의미이다. 한의학에서는 오장육부의 이상을 그 원인으로 들었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오장이 모두 작은 사람은 늘 근심이 많고 노심초사하게 된다. 물론 지금은 이런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긴 세월 동안 우울증은 체액 혹은 장기의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으로 간주되었다.

지금도 우울증이라고 하면 일반인들도 세로토닌부터 떠올린다. 즉 우울증은 신체적 문제가 정신적 증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뇌 속의 세로토닌 수치가 떨어져서 우울해진다는 식의 설명은(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흑담즙이 넘쳐서 혹은 오장이 작아서 우울하고 근심이 많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의 의사들이 몸에서 흑담즙을 뽑아내려고 노력한 것처럼, 부족한 세로토닌을 뇌 안에 채워주면 우울증은 치료되고 모두 행복해질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항우울제가 개발되었으니 우울증이 ‘박멸’될 날도 머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산업화가 무르익은 사회일수록, 오히려 우울장애 환자 수가 폭증하고 있다. 1905년 이전에 태어난 미국인은 1980년, 즉 75세에 이를 때까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단 1%에 불과했다. 그런데 1955년 이후 태어난 미국인이 30세에 이르기 전에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6%에 달한다. 현재는 그 수치가 10%에 육박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의료서비스의 확대, 진단기준의 변화 등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를 아무리 감안해도 우울장애 환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1950년 영국의 수많은 고아원에는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수많은 아이들이 집단 수용되어 있었다. 정신분석가 존 볼비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의뢰를 받아 이들의 정신건강상태를 조사하였다. 2차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 연구 결과, 많은 아이들에게 심각한 정서장애가 발견되었다. 아이들은 아주 산만했으며, 심한 충동성과 폭력성을 보였다.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작은 일에도 큰 불안을 느꼈다. 심한 경우에는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도, 공감을 하지도 못했다.

존 볼비는 동물행동학자 콘라드 로렌츠의 도움을 얻어 이러한 문제가 초기 유아기 애착 실패에 의해서 유발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상당수의 새끼 동물은 주변의 성체 동물에게 친밀감을 느끼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 애착과 돌봄은 상호적 반응이다. 새끼는 어미에게 애착을 느끼고, 동시에 어미는 새끼를 돌보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볼비는 이러한 시기가 바로 생애 첫 2년 반이라고 생각했고, 이 시기가 지나면 깊은 사랑을 받아도 좋은 애착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결정적 시기’에 충분한 애착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후 슬픔과 불안ㆍ우울ㆍ관계의 실패 등 다양한 정서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지난 100년 간 미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경험했다. 인구가 도시에 집중되었고 전통적인 촌락은 와해되었다. 많은 여성들은 가정을 떠나 직장생활을 시작하였고, 확대가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는 무너졌다. 산업화 이전의 전통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충분한 돌봄을 제공할 수 있었고, 아기 곁에는 늘 할머니나 이모, 고모, 이웃 등 다양한 공동양육자가 있었다. 그러나 도시로 몰려든 산업화 세대들은 분절화된 사회에 적응해야만 했고, 집단적인 탁아소가 보조양육자의 역할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저소득 노동자 계층이 이용했던 탁아소는 양육의 질이 형편없이 낮았다. 아이들은 넘쳤고, 보모는 부족했다. 친밀함과 사랑에 기반한, 개별적인 애착과 돌봄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우울증이 증가한 책임을 한 가지 사회적 현상에 모두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불과 100년 만에 우울장애 유병율은 최소 6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은 서구 사회가 겪은 변화를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겪고 있다. 오늘도 수많은 직장맘들이 아침부터 잠에 취한 어린 아이를 다른 이의 손에 맡기고 출근하고 있다. 충분한 기간의 육아휴직을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아쉬운 대로 할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어도 아주 축복받은 경우이다. 곳곳에 0세반, 1세반을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수두룩하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2세 미만의 영아 24만명 중 절반이 넘는 14만명이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전쟁을 겪은 것도 아닌데 수많은 아이들이 생애 첫 시기의 상당 부분을 어린이집에서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수한 보육교사가 적은 수의 아이에게 최선의 돌봄을 제공하는 대다수의 어린이집을, 대전 이후 열악한 영국의 고아원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아무리 양질의 보육시설이라고 해도 부모의 품에 비견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애착과 돌봄은 아주 복잡한 상호작용이다. 돌봄을 박탈당한 어머니에게 어떤 정신적 어려움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조차 잘 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율은 아직 미국보다 한참 낮지만 그 증가속도는 아주 빠른 편이다. 미국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중 얼마나 많은 수의 환자들이 생애 초기에 회복할 수 없는 애착 실패를 경험했을까? 충분한 애착을 얻지 못한 아이 중 일부는 성인이 되어 정신과 의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들이 겪는 만성적인 슬픔과 불안, 공허함을 단지 뇌 내 세로토닌의 기능부전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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