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침데기 언니 오빠도, 넥타이 부대도, 등 굽은 ‘할매’도, 세 살배기 꼬마도 다 하나였다. 코파카바나의 깐델라리아 성모 마리아 축제(Fiesta de la Virgen de Candelaria). 볼리비아의 1월도 무시무시하게 추웠지만 청춘의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새벽 4시였다. 파나마시티에서 콜롬비아를 거친 비행기가 엘 알토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아, 볼리비아! 낯선 한기가 파고들고 색다른 냄새가 풍겼다. 미궁의 공항이었다. 둥근 닭장을 치마 속에 감춘 듯 꽃무늬 벌룬 드레스를 입은 현지인들이 공항 바닥에 치맛자락을 쓸며 다닌다. 뭐지? 해롱해롱했다. 유기농 개기름과 충혈된 눈으로 화장한 우린, 배낭 깊숙이 잠자던 겨울 옷을 주섬주섬 꺼냈다. 춥고 외로웠다. 유일한 이방인 같았다.
점점 울렁거리던 공항 바닥이 급기야 싸움을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공항 내 산소가 공급되는 카페(O2라운지)를 보고 드러난 불편한 진실. 아, 해발 0m에서 직행해 4,000m 즈음에 떠 있는 거구나. 드디어 그분, 고산병이 오시는 거구나.
고산병은 누워도 미치고, 서도 미치는 병이다. 공항에서부터 라파즈 시내, 그리고 축제의 현장인 코파카바나로 이동하는 내내 몸은 알파카 코트를, 목은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를 갈구했다. 관자놀이는 포크로 사정없이 찔리고 줏대 없이 헛구역질이 계속됐다. 깐델라리아 성모 마리아 축제가 대체 뭐길래! 이미 티베트에서 고산병에 완벽하게 KO패를 당했음에도, 어찌 건방지게 이곳에 오려고 했던가.
하늘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눈물이 된 호수. 깐델라리아 성모 마리아 축제는 티티카카 호수를 잉태한 안데스 신화와 가톨릭 전통이 혼연일체가 된 3일간의 잔치다. 이 성모 마리아의 전설은 1576년으로 돌아간다. 잉카 어부들이 티티카카 호수에서 사나운 폭풍을 만났다. ‘살려주세요’ 기도하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친히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이후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어부들은 성지를 만들고 성인상을 세웠다. 현재 코파카바나 중앙공원 앞 대성당 안에 있는, 가장 존경 받는 성인상이 바로 그녀다. 안데스 문화에 근간한 전통복장의 볼리비아노(볼리비아 사람)는 가톨릭에서 태생한 성모 마리아를 향해 기도하고 춤추며 축배를 든다. 축제 기간엔 성모 마리아도 외출한다. 유럽 귀족에 가까운 치장을 하고 안데스를 상징하는 의상과 장식을 병풍으로 한 채. 역사와 문화가 맛있게 버무려진 그들의 현재가 우릴 미치도록 끌리게 했다. 영험한 티티카카 호수여, 그 축제의 전율을 시작하라!
“퍼레이드가 시작됐어!”
침대에서 고산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사이 탕탕이 속보를 전했다. 원래 축제는 다음날부터 예정돼 있었는데, 예고 없던 리허설이 시작된 것이었다. 볼리비아 전국 각지, 그리고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 인근 도시에서 그룹을 이룬 ‘축제꾼’들이 속속 모이는 중이었고, 그 사이 일부가 흥을 참지 못하고 자진해서 거리 행진에 나선 모양이었다. 혼미한 상태로 숙소 문짝에서부터 행렬을 피해 게걸음을 했다. 시작점은 공동묘지. 저 자리가 내 자리인가. 고산병보다 눈앞의 현장이 날 더 아프게 했다. 이 복받친 감정의 관부터 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상] Voice of Youth
영상 고정! 당신을 향해 노래부르는 아저씨의 ‘마빡’을 보기 전까진 영상을 끄지 마세요.
모든 것이 오감을 자극했다. 넥타이 부대의 브라스 연주가 고막을 터지게 하고, 360도 회전하는 여인네의 숄이 뺨을 스쳐갔다. 세상의 모든 컬러를 끌어온 전통복장에 입맛을 다셨고, 야망 없는 탄성에 비릿한 냄새가 났다. 공동묘지에서부터 각 그룹을 대표하는 리더는 앞 팀과의 보폭을 유지하며 나아갔다. 행렬은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폭이 좁고 넓은 골목을 거닐며 티티카카 호수를 우회한 뒤 대성당으로 되돌아왔다. 기찬 행진에 그룹 수가 더해지고, 추리닝으로 간소화한 복장도 구색을 갖추면서 축제는 자연스레 리허설에서 전야제로 진입했다. 해발 3,800m의 코파카바나, 태양 아래 행진은 불야성을 이뤘다. 걸 그룹, 보이 그룹 저리 가라. 안데스식 군무 납신다. 모두들 어깻죽지를 흔들며 춤추거나 찬양했다. 우린 3일 내내 불면의 밤을 보냈다.
청춘을 떠올린다. ‘기지바지’ 아저씨의 골반이 유려하게 돌아가고, 풍만한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날갯짓처럼 팔랑거렸다. 광택 나는 ‘할배’의 팔은 군무에 맞춰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었다. 갓 걸음을 뗀 꼬마도 부모의 아성을 누르는 깜짝 율동을 한다. 이 모든 걸 표절하고 싶었다. 하늘, 호수, 거리, 사람, 꽃, 희망, 그 모두가 꿈틀댔다. 청춘이란, 어떤 기쁨에 몹시 배가 고픈 것. 우린 얼마나 기쁨에 굶주렸을까? 아니 애초에 배도 고프지 않은 심각한 노화 현상을 겪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전의 청춘도 다시 기록됐다. 무엇보다 이 인생에 심한 갈증을 느꼈다.
여행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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