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월 25일
일본인 아나키스트로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1903년 1월 25일 태어났다. 그는 한때 아나키스트였던 박열(朴烈ㆍ1902~1974)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다.
후미코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나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만 23년을 살았다. 박열과 함께 지내며 재일 아나키스트들과 활동한 1,2년여를 빼면 후미코의 생애는 대체로 불우했다. 일본인 부모가 그를 버려 친척 손에 자랐고, 출생신고조차 안된 무적자(無籍者)여서 제때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아홉 살이던 1912년 충북 청원에 살던 고모에게 맡겨져 8년간 조선에서 살았지만 어른들의 학대로 비통한 나날을 보냈다고, 일본인 사학자 야마다 쇼지의 평전 ‘가네코 후미코’(정선태 옮김, 산처럼)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소학교 교육은 받았고, 3ㆍ1운동을 보며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과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치적 각성을 한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를 친부가 유곽에 팔아 넘기려 하자 후미코는 도쿄로 도망쳐 혼자 신문팔이와 오뎅집 점원으로 일하며 어학을 익히고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했다. 도쿄에서 유학하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알게 된 건 1921년 무렵이었고, 박열과 동거를 시작한 건 1922년부터였다.
경북 상주 출신인 박열은 경성고보 재학중 3ㆍ1운동 적극 가담자로 찍혀 퇴학당한 뒤 도쿄로 건너갔다. 그 역시 신문배달과 막노동, 식당 일 등으로 고학하면서 재일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혈거단(血擧團)’이란 단체를 만들어 재일 조선인 중 행실이 불량한(일제의 앞잡이) 이들을 ‘응징(린치)’하거나 일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잡지 ‘불령선인’ 등을 발간한다. 주간조선은 2011년 ‘한국의 명가- 박열’편에서 그는 잡지의 출판비용 조달과 보급 등 대외업무를 주로 맡았고, 원고 집필과 편집은 주로 후미코의 몫이었다고 적었다. “가네코는 문필력이 뛰어나고 학식도 수준 이상이어서 박열의 논설기사 중 대부분이 그녀가 대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후미코와 박열은 연행됐다. 혐의는 ‘대역죄’인 일왕부자 암살 음모였다. 옥중에서 결혼한 둘은 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열흘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박열은 해방 후인 45년 10월 출옥해 초대 거류민단장이 됐고, 이승만 정부를 돕다가 6ㆍ25전쟁 중 납북됐다. 하지만 후미코는 넉 달 뒤 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쇼지는 그의 죽음이 일제의 집요한 전향 공작에 맞서 ‘자기’를 관철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썼다. 후미코의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정애영 옮김, 이학사)에는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사랑 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박열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고, 후미코는 경북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옆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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