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이었던 22일 퇴근하자마자 서울역에서 김포공항행 공항철도를 탔다. 휴가 복장을 한 채, 마음만큼이나 잔뜩 부풀어 오른 백팩을 메고 출근했다. 혼자 떠나는 첫 여행이라 설렜다.
하지만 그토록 바랐던 제주도의 설경은 되레 재앙이 되어 내 휴가를 앗아갔다. 휴가 복귀 못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공항에서 사투를 벌였다고? 그래도 그들은 제주에서 휴가는 즐기지 않았나? 제주 게하(게스트하우스)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휴가만 까먹고 있는 쓰라린 이 심정, 반드시 알려야만 했다.
이게 정녕 휴가라면 차라리 유배가 낫겠다
22일 오후 9시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내일부턴 나름 쫀쫀한 계획이 기다리고 있기에 바로 공항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23일은 우도와 성산일출봉을 볼 계획이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섭지코지까지. 눈 쌓인 성산일출봉이라. 생각만 해도 근사했다. 사전에 두루 섭렵한 제주 맛집 정보들도 다시 한번 살폈다. 먼저 제주도에 휴가를 와 있던(이라 쓰고 폭설에 발 묶인, 이라 읽는다) 선배가 사준 고등어회와 방어회를 맛보며 ‘이게 바로 제주도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꿀맛 같은 저녁을 먹고, 남은 3박4일 일정을 떠올리며 꿀잠에 빠져들었다.
23일 오전 10시쯤 숙소를 나섰다. 간밤에 내린 눈이 쌓여 있었지만 이동이 불가능하진 않았다. 아침 겸 점심은 유명한 고기 국수 집에서 줄까지 서 가며 먹었다. 뭔가 잘 풀리는 듯했다. 다음 목적지는 용머리 해안. 이동 중에 김정희 유배지를 스쳐 지났다. 이런 게 복선이라곤, 휴가가 유배로 둔갑할 거라곤 이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출입통제… 결항… 눈보라…
버스를 타고 성산일출봉으로 향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다. 2시간을 달려 성산일출봉에 도착했다. 인근 숙소에 짐을 풀고 한걸음에 성산일출봉까지 내달았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통제. 뭔가 불길했다. 우도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성산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여객선 결항. 제주에서 들뜬 마음으로 보낸 시간은 딱 17시간. 잠 잔 시간을 빼면 이마저도 반토막으로 줄어든다. 이 때부터 제주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다들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 터. 나름 흥을 내보겠노라고 흑돼지 바비큐를 해 먹었다. 일행도 생겼다. 비록 성산일출봉과 우도는 포기했지만, 휴가 3일차인 24일은 어떤 고난도 헤쳐나가리라 다짐했다.
이중섭 거리엔 눈썰매 타는 사람들만
아침부터 눈보라가 휘날렸다. 첫 목적지부터 다짐이 무너졌다. 정방폭포는 출입 통제였고, 이중섭 거리는 휑했다. 비탈길에서 눈썰매 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엔 문 연 가게가 절반 밖에 안 됐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귀포 근처에 다시 숙소를 잡았다. 빈둥거릴 수만은 없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천지연 폭포는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오후 5시에 길을 나섰다. 하루 종일 펑펑 내리는 눈은 그칠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거세진 눈보라 때문에 눈도 못 뜰 지경이었다. 서귀포 거리에 사람이라곤 덜렁 나 혼자였다. 분했지만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맛집은커녕 저녁은 김치찌개로 때웠다. 시장에 나가도 문 연 가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친해진 일행은 묵으려던 게스트하우스의 수도관이 터져 숙박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다른 숙소를 알아보느라 진땀을 뺐다.
이 날은 바비큐 파티도 취소됐다. 치킨집은 문을 닫았고, 비행기를 놓쳐 우울해진 사람들은 파티 대신 ‘방콕’을 택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휴가가 끝나는 26일, 제주도 날씨가 갠다고 한다.
글ㆍ사진 제주=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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