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서울을 덮친 강추위는 ‘풍찬노숙’에 길들여진 노숙인들의 생활 패턴도 바꿔 놓았다. 하지만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들은 방한텐트도 거부한 채 노숙 농성을 이어갔다.
한파가 몰아친 19일 이후 서울역 13번 출구에 밀집해 있는 노숙인 쉼터들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규칙적인 생활을 강요하는 탓에 평소 보호시설을 꺼리는 노숙인들이지만 이번 한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역 지하도 노숙인 김모(62)씨는 24일 서울역 근처 건물 안으로 숨어 들었다. 김씨는 “올 겨울은 좀 지낼만하다 했는데 느닷없이 추위가 찾아와 도저히 지하도에서 버틸 수 없었다”며 몸을 웅크렸다.
서울 갈월동 숙대입구역 다시서기센터에도 매일 200여명이 넘는 노숙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여재훈 숙대입구역 다시서기센터 소장은 “보통 오후 9~10시에 찾아오던 노숙인들이 오후 6시부터 찾아와 잠자리를 잡는데도 요즘은 자리가 꽉 찬다”고 설명했다.
밀려드는 노숙인을 수용하느라 쉼터에도 비상이 걸렸다. 서울역 희망지원센터 응급대피소는 심야시간에는 대피소 집기들을 전부 치우고 노숙인 잠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 지역 임시보호소들도 이달 말까지 쉼터를 24시간 개방하기로 했다. 이종만 서울역 다시서기센터 실장은 “아무리 추워도 거리를 고집하며 술에 의존하는 노숙인도 적지 않아 24시간 순찰을 돌면서 핫팩과 장갑 등 구호물품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칼바람과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달 한국과 일본 정부가 합의한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비판하며 26일째 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고 있는 대학생들이다.
소녀상 옆에서 잠을 잤다는 이성근(24)씨는 “핫팩을 5개 붙이고 침낭 위에 또 다른 침낭을 덮고 그 위에 비닐과 이불을 샌드위치처럼 덮고 잤는데도 아침에 보니 침낭 위에 서리가 얼어 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23일 더불어민주당의 중재로 경찰이 소녀상에서 20m 떨어진 지점에 방한텐트를 칠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소녀상 지킴이들은 이를 거부했다. 김아영(22)씨는 “그렇게 멀리 텐트를 치면 소녀상은 누가 지키란 말이냐”며 “이 곳을 절대 떠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갑작스레 불어 닥친 한파로 저체온증, 동상 등 한랭질환자 수도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관리본부가 전국 응급실 530곳에서 한랭질환 감시체계를 운영한 결과, 추위가 몰아친 17~20일 55명의 한랭질환자가 발생해 2명이 숨졌다. 직전인 10~16일 발생한 한랭질환자(24명)의 2배가 넘는 규모다.
허경주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채지선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이현주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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