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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미국 내 융단폭격의 역사

입력
2016.01.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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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중 한 명인 테드 크루즈는 최근 중동의 혼란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을 밝혔다. 이슬람국가(IS)에 “융단폭격을 하고 모래가 어둠 속에서 빛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이다. 공화당 경선 선두주자인 도널드 트럼프는 “IS를 폭탄으로 쓸어 버리겠다”고 약속했다. 세 번째 후보인 크리스 크리스티는 러시아와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후보자들의 이 같은 허언 때문인지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30%의 공화당 투표자들(그리고 41%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 나오는 가상의 중심 공간인 아그라바를 폭격하는 데 찬성했다고 한다. 지명이 아라비아어처럼 들렸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 호전적인 수사를 이해하려면 그것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분명 피에 굶주린 괴물일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 좀 더 너그럽게 보자면 그들은 역사적 기억력과 도덕적 상상력이 형편 없을 정도로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들 중 개인적으로 전쟁 경험을 갖고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모른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최근 역사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만 있어도 ‘폭탄으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다. 베트남에서 효과가 없었던 게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효과가 있진 않을 것이다. 나치도 융단폭격 때문에 패한 게 아니었다. 영미 공군의 전후 연구가 증명하듯 독일 도시에 투하된 공중폭탄보다 러시아 탱크가 독일군을 패배시키는 데 더 큰 도움이 됐다.

새해의 시작에 어울리게도 이런 발언들은 역사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지 묻는다. 아무튼 예전과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어진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역사가 알려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 행동의 어떤 패턴들이 반복된다는 걸 감안하면, 과거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현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문제는 정치가들(그리고 평론가들)이 자신들의 이념적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흔히 잘못된 예를 고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되돌아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 때문에 1930년대와 1940년대 예를 가장 흔히 남용한다. 독재자에게 맞서라고 부추길 땐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을 불러 낸다. 성급한 ‘선제’ 전쟁에 대한 회의론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1938년의 유령들을 부활시킨다.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의심을 품었던 사람들은 네빌 체임벌린과 같은 ‘유화론자’로 치부됐다.

나치와 2차 세계대전을 사실상 한 가지 초점으로만 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유익할 수도 있는 다른 역사적 유사점들을 보지 못한다. 오늘날 중동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전쟁들은 혁명적인 종교적 종파들과 부족장들이 강대국의 후원을 받는 무자비한 독재정부와 싸우게 하는데,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과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황폐화시킨 30년 전쟁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니던 군대들은 30년 동안 마을과 도시를 누비며 살인하고 약탈하고 고문했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 다수는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퍼트린 기아나 병으로 인해 죽었다. 오늘날의 전쟁들처럼 30년 전쟁도 본질적으로 가톨릭과 기독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었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아랍 세계가 휘말린 현재의 폭력보다 30년 전쟁은 훨씬 복잡했다. 교황청이 기독교도인 독일 왕자들을 지지했고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가 기독교도인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지했다. 그리고 종파의 경계를 넘어 많은 동맹이 구축됐다. 반면 기독교나 가톨릭의 용병들은 편리할 때마다 편을 바꾸었다.

실제로 30년 전쟁은 유럽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싸움이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는 한 전쟁은 계속됐고 이 때문에 무고한 소작농과 도시의 거주자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오늘날 중동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강대국들, 특히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기대하며 이쪽이나 저쪽을 지지하는 식으로 전쟁에 끼어들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는 두드러진 유사점이 있다. IS는 시아파 지도자들에 대한 수니파의 잔혹한 반란이다. 미국은 IS를 반대한다. 시아파가 지배하는 이란도 그렇다. 수니파 폭군들이 움직이는 사우디아라비아도 마찬가지다. 중동 지역 내 갈등의 중심축은 종교적이거나 종파적인 게 아니라 지정학적이다. 그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의 지역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다. 두 나라 모두 뒤를 봐주는 강대국이 있다. 두 나라 모두 광신도들을 의도적으로 자극한다. 하지만 신학적 차이는 폭력의 점진적 확대를 이해하는 열쇠가 아니다.

이 모든 것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누군가는 완전한 종교 개혁이 중동에 장기적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슬람교의 개혁이 본질적으로 바람직하긴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가까이에 있는 전쟁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시리아의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는 이슬람교의 특정 종파(그의 경우 알라위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 IS는 수니파의 정통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적인 칼리프(이슬람 최고 통치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전쟁을 치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의 투쟁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다.

30년 전쟁 동안 정치적 합의가 가능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한 쪽이나 다른 쪽은 싸움을 지속함으로써(혹은 다른 쪽에게 그렇게 하자고 부추기면서) 더 큰 이득을 계속 추구했다.

오늘날 비슷한 기회를 놓친다면 비극일 것이다. 합의는 타협을 필요로 한다. 적들은 서로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융단폭격에 대해 허풍을 떨고, 협상하려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유화정책이라고 비난하는 건 고통을 연장시키기만 할 뿐이다. 훨씬 더 큰 재앙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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