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까지 놀러 가서 책을? 당연히 책을! 젊은 귀촌인들이 늘면서 제주의 서점 지도도 새로워지고 있다. 수많은 볼거리, 먹거리 속을 유영하다가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 가볼 만한 제주의 책방 네 곳을 소개한다.
달빛, 귀신, 제주… ‘달빛서림’
책 파는 ‘가게’였던 서점이 책을 주 콘텐츠로 하는 ‘문화공간’이란 또 다른 갈래를 갖게 된 건 200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책을 매개로 방문자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강연으로 그것을 심화시켜 취향과 사상의 느슨한 공동체로 진화하는 것이 이런 공간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달빛서림은 제주 최초의 책 문화공간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강정마을 골목 세탁소 2층, 노래방이 있던 자리에 달빛서림이 들어선 건 2014년 10월이다. 서점 주인인 김키미씨는 월정리 해변의 명물이 된 ‘고래가 될 카페’의 주인이기도 하다. 글쓰기와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는 카페 한 켠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했고, 이게 달빛서림의 전신이 됐다.
서울의 손바닥만한 독립서점들에 비해 공간이 탁 트여 좋다. 서가에는 제주의 역사와 신화, 전설, 무속을 다룬 책들이 빼곡하다. 제주가 관광지로만 소비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김씨가 절판된 책과 희귀서적들을 힘들게 구해 모은 것이다. 도중에 매니저로 합류한 박세영씨의 관심사인 자연농, 먹거리, 땅에 관한 책도 많다. 농업기술원을 졸업한 김씨와 대학에서 자연농을 공부한 박씨는 논 농사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제주에서 쌀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벼농사를 짓고 있다. 여기서 나온 쌀은 매달 여는 동네 장터 ‘개구럼비 마르쉐’에서 판매한다. 개구럼비는 멧부리의 지역명으로, 장을 열면 바로 뒤에 해군기지가 보인다. “강정마을에 어느새 저항과 투쟁의 이미지만 남았잖아요. 싸우러 오는 사람은 있는데 놀러 오는 사람이 없어요. 우린 그 앞에서 축제와 어울림의 장을 열고 싶었어요. 물건을 사고 팔고 예술공연도 보면서 우리가 왜 여기에 사는지에 대해 같이 고민해 보자는 거죠.”
비정기적으로 인문학 강연도 열린다. 지금까지 제주 물의 근원, 제주 무속학, 해양인문학 등을 주제로 강연이 진행됐다.
넉넉한 의자 인심이 감동적. 귀신고래를 모티프로 만든 귀엽고 으스스한 등 아래 튼실한 6인용 탁자 두 개가 놓여 있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책 대여는 하지 않는다.
제주에서 홍대앞 향기를 ‘라바북스’
외지에선 외지문화에 푹 빠지는 게 제 맛이지만 간혹 육지 것들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하얗게 칠한 노출 콘크리트 인테리어, 귀여운 소품,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신간과 독립출판물까지, 서귀포시 위미리에 자리한 라바북스에선 팬시한 홍대 독립서점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10년 간 일하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로 내려온 김은영씨가 라바북스를 연 것은 2015년 5월. ‘좋아하는 일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결정했지만, 바로 이웃한 카페 ‘시스 베이글’의 주인이 김씨와 알고 지내던 사이라 비교적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원래 치킨집이었던 건물 내벽에 눌어붙은 기름때를 박박 닦아내고 직접 하얀 페인트를 칠하면서 제주 생활의 꿈을 부풀렸다.
책은 독립출판물과 신간서적이 반반씩. 최근 화제작인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개인주의자 선언’ ‘시다발’등이 눈에 띈다. 김씨는 책방을 열기 전부터 취미로 사진집을 제작해 왔는데 그 덕인지 외국의 감각적인 잡지들도 제법 갖춰져 있다. 도자기 인형, 자수 같은 소품은 지역 디자이너들의 작품. 가족 단위 관광객이 주로 방문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도 몇몇 가져다 놓았다.
“돈은 크게 안 되지만 서울보다 여유롭다는 것, 좋아하는 일하며 살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장점이죠. 피는 꽃으로 계절을 가늠하는 작은 행복이 서울에선 아예 불가능했으니까요.”
낯선 ‘서울식’ 공간에 호기심을 느낀 동네 어르신들이 불쑥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것도 김씨의 주요한 일상 중 하나다. “이거 해서 먹고 살 수 있겠냐”는 직구에 김씨도 직구로 화답한다. “돈 벌려면 이거 안 했죠.”
예술+인문=‘라이킷’+‘트멍’
제주 동문시장 인근 칠성통(일도1동)은 한때 제주시내 최대 번화가 중 하나였다. 몇 년 전부터 상권이 쇠락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범죄 문제로 골치를 앓았으나 최근 개성 있는 공간들이 하나 둘 문을 열면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라이킷은 칠성통에서도 인적이 드문 골목에 2014년 10월 문을 열었다. 안주희씨가 운영하는 예술서적ㆍ독립출판물 중심의 라이킷과 노우정씨가 관리하는 인문서적 위주의 트멍으로 공간이 나뉜 독특한 구조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제주 해녀학교에서였다. 서울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노씨는 안씨가 칠성통에 책방을 연다는 말에 합류할 뜻을 밝혔고, 서로 다른 독서 취향이 더 다양한 방문객을 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의기투합하게 됐다. “독립출판물의 주고객은 아무래도 젊은 여성에 한정돼 있으니 나이 든 남성들이 읽을 만한 책도 갖추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남자 손님들은 트멍에, 여자 손님들은 라이킷 쪽에 오래 머무세요.”
책방에선 매달 주제를 정해 관련 서적과 디자인 소품을 함께 판매하는 작은 이벤트를 연다. 이달의 주제는 고래. ‘고래의 삶과 죽음’ ‘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등의 도서와 함께 돌고래보호단체 ‘핫핑크돌핀스’에서 만든 고래 인형을 전시해 방문객들에게 고래 보호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손님은 여행자가 절반 이상이지만 최근 귀촌인들의 방문이 늘면서 제주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들도 갖췄다. 좁은 공간을 쪼개 열고 있는 글쓰기 강좌는, 안씨와 노씨처럼 다른 인생을 꿈꾸며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을 연결하는 커뮤니티 역할도 한다. 앉아서 책 볼 자리는 없지만 트멍에 마련된 2인용 벤치에 잠깐 앉아 다리를 쉬어갈 수 있다.
시간의 전시장…최고령 헌책방 ‘책밭서점’
평일엔 오후 3시에 열고 밤 9시에 닫는다. 일요일엔 열지 않는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 ‘책밭서점’의 운영시간이다. 주인 김창삼씨는 책방 주인이자 농부다. 가게 인근에서 감귤과 고구마 농사를 하기 때문에 책방에 내내 붙어 있지 못한다. 빈 자리는 아내가 채울 때도 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아예 닫는다. 드물게 부부가 함께 자리에 있는 날 책방을 찾았다.
“배짱 장사는 아니고 손님이 없으니까.(웃음) IMF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요즘엔 하루 종일 손님 한 명 없는 날도 많아요.” 푸념하던 아내는 손님이 계산대 앞으로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열띠게 책값을 흥정한다.
책밭서점이 문을 연 건 1985년이다. 30년의 역사는 어마어마한 장서를 남겼다. 매장에 나와 있는 책만 6만 여권이고 별도의 창고에 보관된 것을 합치면 10만권이 넘는다. 가치 있는 책, 가치 없는 책, 가치 있다가 없어진 책까지 대중 없다. 10년 전에 나온 토익 문제집은 이제 영업장보다 전시장이 더 어울릴 법하지만 주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 시간에 무감해진 공간에서 손님들도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고서적을 비롯해 70, 80년대 잡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베스트셀러들의 초판 등 표지만으로도 흥미를 끄는 책들이 많다.
책 볼 공간은 따로 없지만, 목욕탕 의자와 플라스틱 의자를 편법처럼 군데군데 놓아 두었다. 흥정소리를 배경 삼아 책을 읽다가 너무 오래 머물렀다 싶으면 한 두 권 사 들고 나오면 된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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