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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민주주의 대모… 중국 반환기 이후엔 변절자 낙인

입력
2016.01.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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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국 영국 출신 빈민운동가

정치인으로 겁 없는 활약

말년에 쏟아진 '기회주의자' 비난

영국 출신 홍콩 정치인 엘시 투는 30대 이후 생애 대부분을 홍콩 서민의 복지와 정의를 위해 바쳤다. 만년의 그는 중국을 편들었지만 그건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국의 위선이 미워서였고, 중국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봐서였다. ‘민주주의자’들에게 그는 변절자였다. theworldmarch.org
영국 출신 홍콩 정치인 엘시 투는 30대 이후 생애 대부분을 홍콩 서민의 복지와 정의를 위해 바쳤다. 만년의 그는 중국을 편들었지만 그건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국의 위선이 미워서였고, 중국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봐서였다. ‘민주주의자’들에게 그는 변절자였다. theworldmarch.org

엘시 투(Elsie Tu)는 1913년 6월 2일 영국 뉴캐슬 어폰타인에서 태어나 34년을 살았다. 나머지 68년 동안 그는 홍콩의 빈민운동가이자 교육자, 정치인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종주국 영국과 총독 정부에 맞서 빈민 복지와 정의를 위해 싸운 그를 “홍콩의 정신” “홍콩 민주주의의 대모”라 불렀고, 중국 반환기와 그 이후(곧 현재)에는 “변절자”나 “기회주의자”라 비난했다. 누가 뭐라 하든 분명한 사실은,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은 바대로 말하고 실천했다는 거였다. 물론 그 자신은 “나는 친중파도, 친영파도 아니다. 나는 늘 홍콩 시민을 위해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엘시 투가 지난해 1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102세.

엘시 투는 1947년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한 해 전 결혼한 남편은 보수 개신교단인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 소속 선교사였다. 2년 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고, 강제추방 당한 부부가 향한 곳이 홍콩이었다. 당시 홍콩은 대륙서 피난 온 이들로 북새통이었다. 부부는 난민촌과 다름 없던 카우룽싱(九龍城)구 웡타이신(黃大仙) 카이탁 무허가 판자촌에 터를 잡고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엘시가 보기에 이웃에게 필요한 건 복음이 아니라 밥과 정의였다. 노점, 행상, 품팔이 노동으로 온 종일 일해도 가족의 끼니조차 못 잇는 가난. 삼합회 조직원들은 보호세 명목으로 자릿세를 뜯었고, 식민지 관료와 경찰은 그들에겐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 100년 전 찰스 디킨스가 본 참경이 거기 있었다.

선교단은 홍콩 정치와 사회 현실에 간섭하려 드는 엘시를 못마땅해했고, 남편과의 불화도 그 끝에 시작됐다. 부부는 자의반 타의반 영국으로 귀국하지만, 엘시는 금세 혼자 되돌아갔다. 결혼 전 교사였던 그는 54년 낡은 군용텐트 한 동을 구해 천막학교를 열고 말도 안 통하는 빈민가 아이들을 모아 영어 교육을 시작했다. 무허가 공동주택 부엌에서 숙식을 때웠고, 강사 일로 번 돈으로 학교 살림을 꾸렸다. 그 천막학교가 저소득층 학생 1,300여 명이 다니는 지금의 ‘무쾅영어학교(慕光英語書院)’가 됐다.

물론 교육만으로 달라질 사정이 아니었다. 일하느라 결석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는 홍콩 현실을 본국 신문에 기고하고 관료들의 부패 실상을 영국 하원에 알리기도 했다. 63년 그는 가우룽싱구 시정평의회(Urban Councilㆍ전원 임명직이던 입법평의회와 구분되는 입법권 없는 의회이자 자치구평의회의 상급의회로 97년 이후 없어졌다) 선거에 출마,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의원이 되자마자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의회 공식언어’폐지였다. 그때까지 영어를 못하면 아예 의원이 될 수 없었다.

60년대 시정평의회 의원 시절의 엘시 투. 그는 의회 내 홍콩 서민의 유일한 대변자였다. 유튜브 화면.
60년대 시정평의회 의원 시절의 엘시 투. 그는 의회 내 홍콩 서민의 유일한 대변자였다. 유튜브 화면.

65년 ‘스타 페리(Star Ferry)’파동이 불거졌다. 의회에 가우룽반도와 본섬을 오가는 도선 ‘스타 페리’의 운임 인상(20홍콩센트→25센트)안이 상정됐다. 지금은 주로 관광용으로 이용되지만 다리도 철로도 없던 당시에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생계 터전을 본섬에 둔 가우룽싱 서민들에겐 가혹한 인상률이었다. 엘시 투는 본국 하원에까지 도움을 청하며 고군분투했지만 이듬해 3월 인상안은 가결됐고,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그가 유일했다. 4월 한 청년이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동조자들이 가세하면서 농성은 금세 ‘폭동’으로 번졌다. 엘시는 선동 혐의로 연행돼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단식 청년이 입었던 옷에는 ‘엘시 만세(Hail Elsi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주택 교육 보건 교통 등 60년대 이후 홍콩 서민 복지의 거의 전 영역을 종횡무진 휘저었다. 최대 난관은 부패, 즉 관료ㆍ경찰과 삼합회의 뇌물-이권 사슬이었다. 그 먹이사슬의 바닥은 물론 서민이었다. 그는 경찰관이 뇌물을 주고받는 현장 사진을 찍어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고, 수수방관하는 영국 정치인들의 위선을 공격하기도 했고, 영국 하원 의원들을 홍콩으로 초청해 직접 현실을 보게도 했다.

74년 출범한 반부패독립위원회(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ㆍ廉政公署)는, 그의 정적들도 인정하는 엘시의 작품이었다. 그는 “삼합회가 유럽인은 좀체 건드리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겁 없이 싸울 수 있었는지 모른다”고, “만일 중국인이었다면 살해했을 거라는 말을 그들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LAtimes,97.1.17) 회고록 ‘엘시 투가 본 식민지 홍콩 Colonial Hong Kong in the Eyes of Elsie’에서 그는 70년대부터 당국의 상시적인 도청을 당해왔다고 썼다.

홍콩 입법회는 1843년 개원 이래 140여 년 동안 전원 임명직으로 구성돼왔다. 85년 의회개혁으로 부분 직선제가 도입됐고, 엘시는 88년 첫 선거에서 시정평의회에 배정된 단 1석에 출마해 입법의원이 됐다.

1985년 결혼할 무렵의 엘시와 앤드루. 유튜브 화면.
1985년 결혼할 무렵의 엘시와 앤드루. 유튜브 화면.

그는 종주국 출신 백인 정치엘리트였지만, 빅토리아피크 부촌에 사는 다른 영국인들과 달리 평생 지역구의 작은 아파트를 떠나지 않았다.(LATimes, 위 기사) 빈민아동 교육 사업도 지속해 2000년까지 무쾅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학교 설립 이듬해인 55년 이혼한 뒤 줄곧 독신으로 살던 엘시는 71세이던 85년, 개교 초기부터 중국어교사로 그를 돕던 8년 연하의 내몽골 출신 교사 앤드루 투(Andrew Tu Hsueh-Kwei, 2001년 작고)와 재혼했다. 엘시가 정치를 하는 동안 앤드루는 학교를 지켰고, 79년 인권단체 ‘공공정의 증진 위원회(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Public Justice)’를 설립해 필리핀 등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 개선과 동성애자 차별 반대 캠페인을 주도했다(Telegraph, 15.12.15) 앤드루는 태평양전쟁희생자추모연맹 리더로서 일본 정부의 배상과 사죄를 촉구하는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80년대 들어 영국과 중국은 홍콩 주권 이양(97년 6월 30일) 협상을 본격화했다. 2047년까지 50년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영ㆍ중 공동선언(국제협정)이 84년 말 채택됐고, 반환 이후 사실상 홍콩 헌법인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 제정작업도 시작됐다. 엘시는 기본법제정 자문위원회 멤버였다. 85년 입법원 부분직선 개혁도 그 과정의 부산물이었다.

공산국가 중국에 대한 불안과 영국의 느슨해진 장악력에 따른 변화의 기대가 공존하던 과도기였다. 92년 취임한 영국 보수당 출신 마지막 홍콩 총독 크리스 패튼(Chris Pattenㆍ현 옥스퍼드대 총장)은 취임 석 달여 만에 의회 선거 등 급진적 선거 개혁을 추진했다. 투표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고, 평의회 정부임명 의원제를 전면 폐지하고 영국식 단일지역선거구제를 도입하고…. 홍콩 시민들은 당연히 열광했고, 중국은 또 당연히 반발했다. 중국 정부는 동의 없이 홍콩 개혁이 실행될 경우 97년 주권 이양과 동시에 홍콩 입법부를 해산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공개 천명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든 홍콩 시민이 자신들의 편이라 믿었던 엘시는 패튼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며 점진적이고 현실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그는 95년 선거에서 32년간 지켜온 시정평의회 의원직을 잃었고, 입법원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중국은 예고한 대로 97년 입법원을 강제 해산했고, 친중국 인사들로 ‘임시입법회’를 구성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거의 모든 정부가 불법ㆍ반민주적 기구로 비난한 임시입법회 의원 60명 중에는 엘시도 있었다. 97년 인터뷰에서 엘시는 “나는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이양된다고 해서 영국 시절보다 민주주의가 퇴보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온갖 말로 비난하지만, 정작 위선자는 영국 정부다. 60년대 이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싸워오는 동안 요지부동이더니 왜 이제서야 민주주의와 개혁이냐. 주권 이양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 입법원 안에 단 한 명의 (직선)의원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반민주로 양분된 구도 위에서, 친중파 정치인 및 거물 기업인들과 나란히 앉은 그는 ‘배신자’였고 ‘변절자’였다. 2003년 7월 홍콩기본법 23조(중국정부에 대한 반역 분리선동 및 반란과 외국정치단체의 홍콩 내 활동, 홍콩 정치단체의 외국단체와의 연계 금지 등 규정) 시행령에 반발해 홍콩 시민 50만 명이 시위를 벌였던 이른바 ‘보안법 파동’때도 엘시는 중국을 편들었고, 2007년 입법원 선거에서도 친중파 후보를 지지했다. 한 민주주의 활동가는 “엘시가 친중 권력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그는 비록 홍콩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역사는 그를 애국자가 아닌 부역자(collaborator)로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반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선임에디터 알렉스 로(Alex Lo)는 엘시의 부고 기사에서 “엘시는 근년의 반대자들이 영국 식민지 정부 밑에서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닐 때 홍콩 주민들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고 썼다. 엘시의 90년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 평가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그는 “전과 후가 하나의 엘시였다”고, “엘시가 중국과 우호적으로 지낸 까닭은 사적인 이익을 얻으려 해서가 아니라 홍콩을 위해 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썼다.(SCMP, 15.12.21) 홍콩전략발전위원회라는 단체의 라우 나이 퀑(Lau Nai Keung)이라는 이는 “중국의 홍콩 정치에 엘시가 맞서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홍콩의 ‘민주주의자’들은 그를 적이라 부른다”며 “누가 민주주의자인지 아닌지 판단할 권한을 독점한 듯 행동하는 그들”을 ‘민주주의 차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chinadaily,2013.6.4)

엘시 투는 98년 임시입법회가 해산되면서 정계를 떠났다 하지만 현안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별로 환영 받지 못할 소신을 피력하곤 했다. 2006년 SCMP 인터뷰에서 93세의 그는 언제쯤 은퇴할 거냐는 질문에 “은퇴가 뭐냐”고 반문하며 이렇게 말했다. “은퇴하면 아무 것도 안 하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럴 순 없지.”

2013년 4월 리카싱(李嘉誠)의 허친슨 왐푸아 그룹 계열의 홍콩 국제항 부두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3주 넘게 파업을 벌였다. 100세의 엘시는 SCMP와 가진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아시아 최고 갑부로 알려진 리카싱을 겨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했다. “왜 당신(들)은 그 많은 돈을 가졌으면서 가난한 당신의 노동자들이 아이들에게 먹일 고기조차 못 사게 하느냐? 왜 당신은 그 많은 돈으로도 모자라 더 가지려고 하느냐?” 그는 “갈수록 악화하는 빈부 격차에 화가 난다”며 정부와 부유층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5일 폐렴 합병증으로 숨졌다. 홍콩과 중국 영국 언론들은 대체로 그와 맞섰을 수많은 전ㆍ현직 관료ㆍ정치인들의 후한 추도사들을 후하게 소개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하지만 향후 중국의 홍콩 정치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고, 반중(反中) 성향 출판인들의 잇단 실종 등 근황을 보건대 홍콩이 맞이할 세월이 그에게 유리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영국과 싸웠듯이 중국도 잘못하면 싸울 것”이라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삼수(三壽)를 다 누린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그 없이 감당해야 할 현실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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