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명의의 재산은 모두 공익 단체에 기부하겠다,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
지난 20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난 대만 장룽파(張榮發) 창룽(長榮ㆍ에버그린)그룹 회장이 남긴 말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컨테이너선을 보유, ‘선박왕’으로도 불리는 그가 일군 창룽그룹의 총 자산은 4,600억대만달러(약 16조5,000억원) 안팎이다. 미국 잡지 포브스는 이중 장 회장의 재산을 16억달러(약 1조9,300억원)로 추산했다. 그는 2012년 한 인터뷰에서 이를 자선 사업에 쏟겠다고 선언했다. 장 회장은 “돈은 돌고 돌며 세상을 이롭게 해야지 혼자 누리거나 독차지하려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부 이유에 대해 “많은 돈을 모았을 때의 기쁨은 순간”이라며 “반면 선행에 돈을 쓰고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는 기쁨은 영원히 가슴 속에 남는다”고 설명했다. 장 회장은 자식들이 서운해 할 것을 의식한 듯 “젊은 사람들은 부모에게 기대려 해선 안 되고 부모를 원망해서도 안 된다”며 “자손들은 스스로 최선을 다해 계속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도움이 더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수성가한 장 회장의 삶을 보면 그의 기부는 의미가 더 깊다. 그는 17세 때 대만에서 사업하던 일본 선박 회사의 객실 청소원으로 입사, 독학으로 3등 항해사가 된 뒤 선장까지 올랐다. 15년간의 항해 생활 후 1968년 창룽해운을 창립, 85년에는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단을 운영하게 됐다. 89년 대만의 첫 민영 항공사인 창룽항공에 이어 철강 물류 호텔 등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사실 대만 재벌 회장 중엔 기부천사들이 많다. 애플 아이폰을 조립하는 폭스콘으로도 유명한 궈타이밍(郭台銘) 훙하이(鴻海)그룹 회장은 이미 2008년7월 재산의 90%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그의 재산은 1,800억대만달러(약 6조5,000억원)로 추정됐다. 실제로 그는 5개월 뒤 150억대만달러를 암 전문 병원 등을 짓는 데에 기부했다. 동생과 아내를 암으로 잃은 게 계기였다. 인옌량(尹衍樑) 룬타이(潤泰ㆍ루엔텍스)그룹 회장도 2011년12월 “사후 전 재산의 95%를 기부, 자선 사업에 쓰겠다”고 밝혔다. 섬유 유통 부동산 사업 등을 벌여 온 그의 개인 재산은 32억달러(약 3조9,000억원)에 이른다는 게 대만 매체들의 분석이다.
기부천사가 많은 대만 재벌 회장들과 달리 우리나라 주요 기업 회장들은 전 재산을 내 놓겠다는 선언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남들이 전혀 모르게 선행을 하는 회장들도 많겠지만 겉으로 알려진 건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이 지난해 사재 2,000여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정도이다.
사실 전 재산을 내 놓는 기부 문화는 핏줄과 상속을 중시하는 동양 사회에선 어려운 줄 알았다. 그래서 세계 최고 기부가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나 딸을 낳았다며 주식 99%를 기부하겠다고 밝힌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관련 소식들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로 여겼다. 그러나 대만 재벌 회장들의 선행은 기부에 동서양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기업의 궁극적 존재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사회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는 장룽파 회장의 말은 울림이 있다. 전 재산을 기부하지 않더라도 사회 공헌에 앞장서는 회장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이다. 경제 환경이 어려워 졌다고 채용을 줄이고 갓 입사한 사원까지 자르기 보다는 그럴수록 더 많은 청춘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용기있는 ‘사업보국’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재벌 회장님의 연예 이야기나 형제들간 싸움 이야기보다는 선행 이야기가 많이 회자될 수 있길 꿈꿔본다.
박일근 베이징특파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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