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용 화로구이 식당도 생겨나
혼자 놀기의 최고봉은 혼클·혼놀
클럽·놀이공원서 ‘나홀로 해방감’
20일 낮 12시, 서울 신촌의 일본식 라면집 ‘이찌멘’. 칸막이가 쳐진 1인식당으로 유명한 이곳에 도착하면 출입문 옆의 주문용 자판기가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다. 먹고 싶은 메뉴를 누르고 카드를 긋자 식권 발권. 반대편 벽에 붙은 공석 표시판에 따라 독서실 같은 1인석 자리에 착석하면, 커튼이 걷어 올려진 앞쪽 공간으로 손밖에 보이지 않는 직원이 식권을 요구한다(놀라지 말고 제출할 것!). 잠시 후 음식이 나오고 정면의 커튼이 내려지면 완벽하게 고립된 나만의 공간. 지금 여기엔 나와 라면, 오직 둘뿐이다. 이곳은 그저 사회성과 공동체정신을 상실한 히키코모리의 병적인 공간인 걸까? 혼자이기 위해 굳이 칸막이라는 단절의 장치가 필요한 걸까?
적요와 은폐의 이 공간은 그러나 뜻밖에도 안온하다. 무엇으로부터 위협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라면 국물을 후루룩거리는 동안 머릿속에선 잡념인지 사색인지 모를 생각들이 쉼 없이 일어나고,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을 둘러봤다. 이어폰을 낀 채 책장을 넘기고 있는 여대생, 라면과의 만남에 몰입해 있는 직장인,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청년…. 옆자리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깜짝 놀라는 그녀(22세·직장인). 왜 여기에 온 걸까? “한 달이면 서너 번은 꼭 오는 편이에요. 직장이 이 근처이기도 하고, 남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좋죠. 음식에 집중할 수 있고,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직장에서 벗어나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좋더라고요.”
누가 ‘혼밥’을 외롭다고 했는가
혼자 먹는 밥을 일컫는 ‘혼밥’은 싱글족이나 기러기아빠 같은 1인가구의 급증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현상이라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그러나 혼밥을 즐겨 먹는 사람들이 반드시 1인가구인 것은 아니다. 4인가족의 구성원도, 사교관계가 발달한 직장인도 때때로 혼밥을 즐긴다. 밥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한다는 공고한 사회 통념은 얼마나 자주 불필요한 모집과 성원의 절차를 강제했는가. 노동이란 수많은 사람과의 끝없는 접촉이고, SNS는 수천 명의 가상 친구들이 쉴 새 없이 새 소식을 알려오는 번잡한 세계로 인간을 내몰았다. ‘혼자’의 욕구는 이 촘촘하고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 투쟁이자 네트워킹 시대의 당연한 반작용이다. 일본 대학교수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 베스트셀러로 돌풍을 일으킨 것,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정운), ‘고독이 필요한 시간’(모리 히로시), ‘나와 잘 지내는 연습’(김영아) 등 ‘혼자’를 키워드로 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 컬러링 북과 필사책, 종이접기와 나노블럭이 유행하고 있는 것. 모두 치유의 방책으로, 오롯이 혼자이기 위한 필사의 노력들이다.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삼시세끼는 ‘혼자’의 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혼밥은 더 이상 불쌍한 밥, 외로운 밥이 아니다. 혼밥식당을 표방하는 곳도 급격히 많아졌다. 칸막이까지 쳐놓지는 않았더라도 바 형태의 좌석을 창가 등 곳곳에 마련해둬 혼자서 4인석을 차지해야 하는 민망함을 불식했다. 그렇다고 손님을 1인으로만 한정하지는 않는다. ‘이찌멘’은 총 23석의 좌석 중 1인석이 11석, 2인 커플석(2인 단위로 칸막이가 쳐진 자리)이 6석이다. 국내 최초의 칸막이 식당으로 8년 전 개업했을 때에 비해 1인석 손님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이명재 이찌멘 대표는 “처음 개업했을 때는 1인석 손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싱글족이 늘어나고 혼밥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지금은 60% 이상이 혼자 오는 손님들”이라고 말했다. 1인석 자리가 모자라 양해 하에 커플석에 합석시키는 일도 잦을 정도라고.
혼밥 손님과 단체손님이 함께 오는 식당에서는 아무래도 혼밥족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1인식당을 표방하는 곳들은 도서관 안내문처럼 정숙을 요하는 표지판을 걸어둔 곳이 많다. 신촌의 베트남 쌀국수집 ‘미분당’은 1인용 바 좌석만 있는 작은 식당으로, 좌석마다 “미분당은 누구나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주인의 뜻에 따라 탄생하였습니다. 부디 이 공간을 이용하시는 고객께서는 이 점 이해하시어 옆 사람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말씀해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라고 써붙여 놨다.
혼밥 레벨의 최고봉 혼자서 고기 먹기
먹는다는 것은 인간 고유의, 그러나 적나라한 욕망이어서 누구에게나 함부로 보여주기는 어쩐지 어색한 행위다. 입을 한껏 벌린 채 입 속 내벽을 드러내며 음식을 집어삼키는 모습. 특히 그 음식이 고기일 때는 원시상태로 벌거벗겨진 느낌마저 든다. 더군다나 고기는 2인분 이상 주문이 필수. 삼겹살 2인분을 혼자 구워먹고 나온 호연지기 넘치는 인증샷은 SNS의 도시전설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혼밥 레벨’의 최고단계로 고깃집 가기가 꼽히는 이유다.
혼밥족들의 이 같은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등장한 트렌드가 1인용 화로구이 전문점이다. 선술집처럼 생긴 식당에 들어가 바 형태의 자리에 앉으면, 1인 전용 화로에 1인분의 고기가 나온다. 홍대 앞과 강남 일대에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3개월 전 문을 연 홍대 앞 1인 화로구이 식당 ‘뱃장’을 찾았다. 일본풍 선술집을 떠올리게 하는 식당에는 4인석 두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 형태의 1인석이다. 메뉴는 투플러스(일명 ‘투뿔’) 한우로 1인분에 150g, 가격은 등심, 채끝 등심이 3만4,000원, 부채살, 치마살이 2만9,000원이다. 자리에 앉으면 먼저 샐러드가 제공되고, 잠시 후 1인용 화로와 소금, 접시, 무 초절임이 담긴 1인용 쟁반이 나온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고기와 나의 전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혼자서 고기를 굽는 것은 낯선 경험이지만, 내 스타일대로 익히고, 자르고, 먹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혼자 고기 먹기는 어지간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어서 식당 앞에는 머뭇거리는 손님들이 많다고 한다. 오후 7시쯤 찾은 식당에는 혼밥족보다 친구들과 함께 온 손님들이 더 많았다. “혼밥족 비율은 30% 정도 돼요. 그 중 여성손님이 70% 정도고요. 주로 밤 12시를 전후해서 많이들 오시죠.” 박상민 뱃장 대표는 “업무 때문에 끼니를 놓친 전문직 여성들이 손님으로 많이 온다”며 “요즘은 많이 먹어야 하루 두 끼인데, 한번 먹을 때 좋은 음식, 제대로 먹자는 생각으로 찾아오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힘든 하루의 저물 녘에 내가 나를 아껴준다는 마음, 나는 소중하니까 투뿔 등심. 박 대표는 “처음에는 용기를 내 찾아왔던 손님들이 한번 안면을 트고 나면 단골손님이 된다”며 “앞으로는 일본처럼 혼자서도 음식을 즐길 수 있는 1인식당이 확실한 문화로 자리잡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혼자서 놀이공원, 혼자서 클럽도
혼밥으로 용기가 다져지면 혼자서 할 수 있는 활동의 범주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쇼핑과 영화보기, 여행처럼 이미 혼자 하기가 자연스러운 활동 외에도, 혼자서 술 마시는 ‘혼술’, 혼자서 클럽에 가는 ‘혼클’, 혼자서 놀이공원에 가는 ‘혼놀’까지 무궁무진하다.
취업준비생인 문태일(26)씨는 놀이공원 가기를 즐겨 하는 ‘혼놀족’이다. 처음에는 지인들과의 약속이 깨지면서 될대로 되라, 나 혼자라도 가자 하며 나섰던 터라 특별한 철학이 없었다.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며 타고 싶은 놀이기구를 실컷 타다 보니 자아를 찾기 위한 모험에 묵언수행이 따로 없었다. “놀이공원에 들어가자마자 T익스프레스 같은 스릴 넘치는 기구부터 시작해 웬만한 놀이기구는 전부 타본 것 같아요. 케이블카를 타면서 정적인 시간을 즐기기도 했고요.” 문씨는 “타인들과 약속을 잡으려면 그 사람의 스케줄, 라이프스타일, 만나는 지점과의 거리 등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복잡하고, 하나라도 틀어지면 골치 아파진다”며 “혼자 놀이공원에 가면 다른 사람에 맞추거나 이끌고 가야 하는 부담감 없이 자유라는 해방감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1인석으로 제작된 놀이기구가 극히 적기 때문에 3명씩 홀수로 온 사람들 틈으로 불가피하게 편입돼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럴 때면 “썩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몇 분이시냐”고 묻는 직원들과 혼자라고 말하면 수군거리는 뒷사람들 때문에 혼밥만큼 편하게 만끽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저는 혼자 가는 게 좋더라고요. 타고 싶은 놀이기구 마음껏 탔다는 게 제일 좋고요. 타기 싫은 거 억지로 탈 필요도 없고, 남 탈 때 기다리느라 시간 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최고죠.”
혼놀족의 최대 애로사항은 사진찍기다. 직장인 오지윤(가명)씨는 ”셀카봉도, 미러리스 카메라도 혼자 사진 찍기에는 불편하더라”며 “그래도 똑같은 놀이기구 두 번 탄다고 뭐라 할 사람 없어서 너무 편하고 좋다”고 말했다.
혼밥이 일반화하고 있는 요즘, 혼자 하기의 최고 레벨은 ‘혼클’ 아닐까?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이상기(26)씨는 대학 입학 직후부터 친구들과 클럽 다니기를 즐겨 했지만, 점점 친구들 페이스에 맞추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다 혼클족이 많아졌다는 소문에 용기를 내 첫 발을 내디뎠다. “혼자만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어 좋아요. 저처럼 혼자 온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도 있고요. 친구들과 함께 가면, 나는 힘든데 더 놀자고 하거나 나는 더 놀고 싶은데 그만 가자고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스트레스를 완벽하게 해소할 수가 없는데, 혼자 가면 더 신나고 재밌게 놀 수 있는 것 같아요. 혼자라는 데서 오는 해방감이 엄청나거든요.”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사람들은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소속된 집단이나 가까운 친구가 없으면 자신을 낙오자로 여기며, 관계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쏟는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관계에 휘둘리는 사람은 평생 다른 사람의 기준에 끌려 다닐 뿐이다. 사람은 혼자일 때 성장하기 때문이다.” 혼밥, 혼술, 혼놀, 혼클…. 혼자 하기의 범주가 확장될수록 관계에서의 에너지도 더 효율적으로 급속 충전된다. 나홀로족의 슬로건이 ‘혼자서도 잘해요’에서 ‘나는 혼자가 좋다’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김다은 인턴기자(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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