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yshwang@hankookilbo.com
민주(民主)와 어울리기 어려워
‘건국의 아버지들’을 기억하자
개개인의 공과 함께 평가해야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평가하자는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의발언이 야권에 정체성 논란을 불렀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의 즉각적 반발과 ‘건국절’에 대한 입장 표명 요구를, 한 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전력을 거론해 맞받아치면서 불붙은 논란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러나 논란을 계기로 국민의당 지지율 상승세가 꺾이자 한 위원장은 해명과 사과, 김구 묘역 참배 등으로 논란 진화에 나섰다.
적잖은 전문가들은 한 위원장의 이번 발언이 나름대로 계산된 것이라고 보았다. 더민주와 결별하면서 밝힌 이념노선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는 데 현대사나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처럼 좋은 재료가 없다. 실용ㆍ온건 개혁파가 주축인 국민의당이 온건보수 세력에 친근감을 표해 외연을 확장하려면, 보수ㆍ진보 사관이 엇갈리는 현대사 쟁점에 다소 보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을 성싶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보수의 핵심 징표처럼 여겨져 온 ‘이승만 국부’ 논의를, 그것도 4ㆍ19 민주묘역에서 꺼내 든 것은 ‘계산된 의도’보다는 발언의 즉흥성이 두드러진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을 계기로 그 동안 여러 차례 거듭된 논란의 내용에 비추어 초대 대통령이니 국부라고 불러도 좋지 않겠느냐는 그의 생각이 너무 순진하거나 안이해서 더욱 그렇다.
반면 그의 발언을 두들기느라 여념이 없는 더민주나 진보학계의 ‘국부’ 인식은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이나 터키의 케말 파샤처럼 건국의 기초를 닦고, 초대 최고지도자로서 국가발전에 분명한 족적을 남기고, 국민적 존경을 잃은 적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 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안으로 거론된 김구나 박정희ㆍ김대중 등 어느 누구도 이런 엄밀한 기준을 채우지 못한다. 이 전 대통령이 국부가 아니듯, 다른 정치지도자 가운데도 마땅한 후보는 없다.
이런 현실을 두고 ‘국부가 없는 이상한 나라’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국부는 없을 수도 있고, 없어도 좋고, 실제로도 없다. 우선 국부라는 말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보다는 중앙집권적 왕조 통치의 전통이 강한, 동양적 특성과 가까이 있다. 국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의 아버지’로, 대비되는 말인 국모(國母)가 왕비를 가리키듯 임금을 가리킨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君師父一體)라는 통치이데올로기가 ‘사부(師父)’와 함께 낳은 말이다. 아울러 국부가 있는 나라는 대개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거나, 여전히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국민통합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왕정의 역사를 털어낸 자리에 세워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굳이 국부의 존재를 희구할 이유가 없다. 아니,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민족주의 이념의 퇴행성이 충분히 드러난 이제 와서
국부를 가지려는 발상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프랑스가 드골, 미국이 조지 워싱턴을 국부로 섬긴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억지로 갖다 붙였을 뿐 보편적 국민 인식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은 국부보다는 ‘건국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을 흔히 쓴다.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모두에 ‘87년 전 우리 아버지들(our Fathers)’이라고 언급한 사람들이다. 대영 독립전쟁 발발 1년 뒤인 1776년 ‘독립선언문’과 이듬해 제헌의회의 건국헌법 기초작업에 헌신한 주역들이다. 독립전쟁을 이끈 전쟁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물론이고 , 존 아담스,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등 많은 사람이 포함된다.
그러고 보니 논리적으로든 현실로서든 존재할 수 없는 국부가 아니라 미국처럼 ‘건국의 아버지들’을 꼽아보려는 노력은 필요할 성싶다. 밑도 끝도 없는 헛된 국부 논란으로 현대사 인물들의 얼룩만 들춰낼 게 아니다. 그 대신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 많은 우리 ‘건국 아버지들’을 집단으로, 개개인의 공과(功過)와 함께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 안의 역사 화해에도 좋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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