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목소리가 너무 크다. 남편이 웃고 있어야 집에 들어올 맛이 나지.”
성 역할 전환극 같은 이야기에 시청자들이 당황해 하는 사이, 남편을 향한 아내의 타박이 이어진다. “여자가 하는 일에 토를 너무 달아. 그냥 조용히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면 돼.”
JTBC 가상 결혼 예능프로그램 ‘님과 함께 시즌2-최고의 사랑’(이하 '님과 함께')에서 개그우먼 김숙(41)은 안 그래도 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남편 윤정수(44)를 향해 툭하면 “어디 남자가~”라는 호통을 날린다. 처음 들었을 때야 기가 막혔을 테지만 이제는 남편 윤정수도 체념한 듯 아내의 거친 면박을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 웃어 넘기고 만다.
TV 속 ‘가모장’(家母長) 캐릭터가 연일 화제다. 개그를 바탕에 깐 예능프로그램인 걸 감안하더라도 미디어에서 대개 남성에 순종적인 이미지로 그려져 온 여성의 반란이 신선하고 통쾌하다는 의견들이 줄을 잇고 있다.
‘님과 함께’의 김숙은 단연 여장부 캐릭터의 선봉장이다. 김숙은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원래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 잘 하는 남자를 좋아했다. 그깟 돈이야 내가 벌면 된다”는 말로 ‘님과 함께’ 속 캐릭터가 실제 본인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의 전무후무한 가모장 캐릭터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다. 지난해 10월 이 커플이 첫 출연했을 때만 해도 3%대 넘기 힘들었던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입소문을 타더니 현재 4%대를 돌파하며 상승세다. 여성 팬들 사이에선 걸 크러쉬(Girl Crushㆍ여성이 여성에게 반함)를 빗댄 ‘숙 크러쉬’,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여주인공 여전사 퓨리오사에 빗댄 ‘퓨리오숙’, ‘갓(God)숙’ 등의 신조어가 쏟아졌고, “김숙의 거침없고 주도적인 모습이 통쾌하다” “가상 연애 프로그램에서 주로 순종적으로 그려지던 여성 연예인들의 모습과는 180도 달라 답답한 속이 뻥 뚫린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최근 종영한 tvN ‘응답하라 1988’에서 ‘쌍문동 치타 여사’ 미란(라미란)도 가모장 캐릭터에 가세해 인기를 끌었다. 극중 10대 때부터 일수꾼으로 활동해 온 미란은 강한 생활력을 밑천 삼아 가정에서도 경제권 등을 포함한 실권을 행사한다. 살림을 전담하는 가정주부이면서도 남편 성균(김성균)에게 기죽지 않고 오히려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물론 과거에도 소위 ‘센 언니’들은 꾸준히 있어왔다. MBC 가상 결혼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했던 가수 서인영은 자신의 취향이나 호불호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캐릭터로 사랑 받았다. Mnet의 여성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 출연자 제시와 치타 역시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개성을 분출하는 모습으로 여성 팬들 사이에서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남성 시청자들도 기세 등등한 이들의 모습에 불쾌함을 느끼기보다 호응을 보낸다는 점이다. 방송가에서 ‘센 언니’들은 10여 년 전만 해도 ‘너무 나댄다’ ‘여자답지 못하다’는 평과 함께 이단아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개성이 뚜렷하고 당당한 개인으로 인정 받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 배승원(23)씨는 “제시처럼 남을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를 좋아한다”며 “여성이 버티기 힘든 사회라 그런지 나중에 딸을 낳더라도 강한 여성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사 신모(53)씨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현재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좀더 일찍 이런 여성상이 등장했어야 한다”며 “그 동안 미디어에서 보여준 청순가련하고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보다 김숙 같은 캐릭터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가모장 캐릭터의 인기에는 우리사회 가족관계의 변화상이 녹아 있다. 이종임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경제활동에 주도적인 아내(김숙)와 집안 청소에 열심인 남편(윤정수), 강한 아내(라미란)와 부드러운 남편(김성균)으로 변화된 성별 범주가 대중에게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미디어가 남녀관계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남성 연예인에 비해 자신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힘들었던 여성 연예인들이 자신만의 캐릭터를 분명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최근 인기 예능 프로그램 대부분이 ‘남성천하’인 점을 감안할 때 강한 캐릭터 구축이 이들의 설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이들의 모습은 미디어 속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됐던 여성의 이미지에서 탈피했다는 점만으로도 신선하고 통쾌한 측면이 있다”며 “(김숙 등이) 다른 여성 연예인들에게 자신만의 캐릭터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미디어가 평등한 남녀관계를 반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부장적 악습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은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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