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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감귤, 이국적 풍경에 가려진 영욕의 역사

입력
2016.01.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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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수탈의 대상…1970년대는 ‘대학나무’로 한 몫

요즘 감귤가격 하락으로 제주의 농가들이 울상이다. 수확철인 11월 잦은 비로 당도가 떨어지고 부패 현상이 많이 발생하면서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제주 경제에서 감귤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 관광산업이 제주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일반 서민들의 경우 감귤 가격에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감귤 수익이 직접적으로 가정경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감귤이 제주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말할 때 ‘대학나무’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감귤농사를 지어 그 수입으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감귤이 제주사람들에게 늘 고마운 존재는 아니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감귤은 관아의 수탈 도구로 이용됐고, 이로 인해 제주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제주 감귤은 조선시대 임금님께 올리는 대표 진상품이었고, 감귤 과원은 특별 관리대상이었다. 제주에 관리로 온 이들은 당연히 감귤 수확량에 지대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갓 열매를 맺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무에 달린 숫자를 파악할 정도였다.

모든 과일이 그렇듯 제주 감귤도 태풍이 지나면 상당량의 열매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관리들은 도민들에게 당초 확인한 만큼의 수확량을 요구했다. 일부 농민은 이 고초에서 벗어나기 위해 뜨거운 물을 감귤나무에 붓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나무가 자연스럽게 고사한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다. ‘감귤나무가 없다면 이 고생도 없어질 것’이라는 절박함에서 나온 고육지책이다.

풍작으로 우수한 품질의 감귤을 생산하더라도 한양까지 운반하는 것 또한 큰 문제였다. 겨울철 풍랑으로 제때 보내지 못해 썩는 사례도 있고, 큰 파도에 배가 침몰하거나 표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 감귤이 제주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이 때문이다. 한양으로 향하던 감귤 운송선이 일본까지 밀려 침몰하는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제주사람들에게는 이렇듯 한(恨)의 대상이었지만, 외지인에게 감귤은 당시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식됐던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귤림풍악(橘林風樂) 장면이다. 기녀들이 과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풍악을 즐기는 모습을 상세히 그렸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이기에 더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은 듯 하다. 탐라순력도는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1653∼1733)이 도내 각 고을을 순력하면서 본 모습을 화공 김남길이 그린 화첩이다. 헌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조도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10가지를 소개하면서 귤림상과(橘林霜顆)라 하여 제주감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제주 출신 문인 매개 이한우(1818~1881)가 꼽은 영주십경(瀛洲十景, 제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10곳)에도 귤림추색(橘林秋色)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요즘 관광객들의 눈에도 노랗게 익어가는 제주감귤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 이국적 풍경 너머로 제주사람들이 당한 말 못할 고초, 그리고 대학나무로 불리며 제주경제를 지탱했던 1970년대의 향수도 함께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가격폭락으로 어려움을 겪는 감귤농가를 위해 제주감귤을 많이 드실 것을 권한다.

강정효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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