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 머리 표현이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20ㆍ세계랭킹 51위)에게 딱 어울리는 구절인 듯 하다. 시인은 이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했다.
이변을 기대하기에는 세계 랭킹 1위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정현은 18일 호주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린 시즌 첫 메이저 테니스대회인 호주오픈(총상금 4,400만 호주달러ㆍ약 368억원) 남자단식 본선 1회전에서 노박 조코비치(29ㆍ세르비아)를 만나 0-3(3-6 2-6 4-6)으로 물러섰다.
호주오픈 통산 5차례 정상에 오른 조코비치는 2014년 7월부터 랭킹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경기 시작전부터 정현의 2회전 진출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정현으로선 세계 테니스 팬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 한 단계 기량을 성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코비치의 서브게임으로 시작된 1세트 초반에는 박빙 승부가 펼쳐졌다. 정현은 게임스코어 2-2까지 맞섰지만 이후 조코비치의 발리샷에 서브 게임을 내주면서 2-4까지 끌려갔다. 곧바로 정현은 조코비치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 해 3-4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정현은 상승세를 살리지 못하고 상대의 경기 운영에 말려 내리 3게임을 내주면서 첫 세트를 3-6으로 내줬다. 1세트 초반 팽팽한 기 싸움에서 정현은 랠리 횟수 25회 등 스트로크 대결에서 밀리지 않았지만 긴 랠리에서 번번이 점수를 잃으면서 맥이 풀렸다.
2세트에서 정현은 경기 초반 흔들렸다. 힘이 들어간 듯 리턴이 연속으로 라인을 벗어났고 첫 게임부터 자신의 서브 게임을 내줬다. 정현은 두번째 게임까지 브레이크를 당해 0-4까지 끌려가는 등 세계 최강 조코비치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조코비치는 빈틈없는 리턴 능력을 과시하며 정현의 서비스게임을 8차례나 듀스로 몰아갔다. 정현은 서브 에이스 2개를 연달아 뽑아내는 등 2세트 막판 두 게임을 따내며 다시 전열을 재정비했다.
3세트에서 정현은 첫 게임부터 15-40으로 밀렸고 조코비치의 절묘한 포핸드 리턴에 브레이크를 당했지만 이후 착실히 서비스게임을 지키며 4-5까지 추격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첫 서브 게임을 내준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경기 시작 1시간55분 만에 무릎을 꿇었다.
정현은 이날 조코비치의 서브 게임을 한 차례 따냈고 서브 에이스 5개를 기록했다. 반면 조코비치는 정현의 서브 게임 5개를 가져갔고 에이스는 10개를 꽂았다. 서브 최고 시속은 정현이 199㎞로 조코비치(198㎞)보다 앞섰으나 에이스 개수는 조코비치가 오히려 2배였다. 조코비치는 네트에 접근해서 벌인 네트 플레이를 15차례 시도해 모두 포인트로 연결했고 공격 성공 횟수에서 40-16으로 정현을 압도했다. 더블폴트는 3-2로 조코비치가 하나 더 많았다.
정현은 자신의 장기인 스트로크 대결에서는 조코비치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반면 네트플레이와 서브 부분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해결 과제를 남겼다. 조코비치는 “정현이 키가 큰데도 매우 잘 움직였다”며 “좀 더 경험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어 “베이스라인 플레이가 훌륭하고 빈틈없었다”면서 “특히 백핸드가 좋았다. 좌우측에서 모두 매우 강하고 낮은 동시에 빈틈없었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정현은 “한 게임을 따내기도 벅찼기 때문에 그저 매 포인트 최선을 다했다”면서 “조코비치는 움직임이 빨랐고 공은 묵직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그는 “세계랭킹 1위이자 우상인 조코비치와 경기를 하게 돼 행복하고 긴장되기도 했고, 메인 코트라 떨렸다”면서 “세계 랭킹 목표는 따로 없지만 리우 올림픽에는 꼭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정현은 남자복식 경기까지 치르고 귀국해 내달 초부터 ATP 투어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김기중기자 k2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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