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데려갈 수 있으면 1억원이라도 내겠습니다.”
지난해 10월 중순 한 중국인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서울 강북경찰서 지능팀 사무실로 들어섰다. 지난해 한국으로 유학을 떠난 아들(20)이 한국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왕모씨였다. 왕씨는 애지중지 키워 유학까지 보낸 외아들이 범죄에 가담해 구속됐다는 경찰의 설명을 믿기 어려웠다. 중국인 공범 한모(20)씨의 부모도 같은 날 경찰서를 찾아 “우리 아들이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중국어로 열심히 사정을 설명했다.
비극은 ‘한국 명문대 졸업장’이란 스펙을 만들어 주고픈 부모의 욕심에서 싹텄다. 사실 왕씨와 한씨는 고교시절 성적도 낮았고, 한국말 역시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돈만 내면 얼마든지 한국의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꼬드기는 유학원과 브로커는 주변에 널려 있었다. 두 사람은 공인한국어시험 성적조차 없었지만 유학 브로커에게 돈을 건넨 뒤 서류조작 등을 통해 지난해 3월 서울 소재 S사립대의 신입생이 됐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한 유학생활이 잘 될 리 만무했다. 왕씨는 강의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툭하면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위챗으로 고향 친구들과 대화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던 지난해 6월 익명의 위챗 사용자가 “용돈을 벌어 볼 생각이 없느냐”며 솔깃한 제안을 했다. 대포통장에 입금된 돈을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빼내 중국으로 보내는 간단한 일이었다. 왕씨는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생각에 4개월간 범행을 이어갔다. 같은 빌라에 살던 룸메이트 한씨도 끌어 들였다.
이들이 보이스피싱 인출책으로 활동하며 거둔 수입은 고작 500만원. 반면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자는 28명, 피해액은 6,800만원에 달했다. 경찰은 실제 피해액은 3억원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사람은 결국 지난해 10월 사기 혐의로 구속돼 검찰에 송치됐다.
왕씨와 한씨는 경찰 조사에서 별다른 죄의식 없이 범죄에 가담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15일 “부모도 아들을 보자마자 죄를 꾸짖기는커녕 억대의 합의금부터 제시하며 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했다”며 “중국의 ‘소황제’가 왜 사회문제가 됐는지 알 것 같다”고 혀를 찼다. 현재 두 사람의 부모는 일부 피해자와 합의를 끝냈고, 아들의 감형을 위해 공탁까지 고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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