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에 대하여
수잔 스튜어트 지음ㆍ박경선 옮김
산처럼 발행ㆍ424쪽ㆍ2만2,000원
기호와 뜻 사이에 필연성 없는 언어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 지시 못해
이 불완전성에서 인간 갈망 싹튼다
서사의 위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일상에서 서사의 주된 용도는 해명일 텐데, ‘사정을 알고 나면 세상에 나쁜 사람 없더라’란 말에서처럼 사정을 설명하고 사실 아래 진실을 끌어내는 게 서사의 가장 흔하고 감동적이라 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러나 이처럼 일상적 효용을 넘어선, 좀더 은밀하고 야심 찬 목적이 서사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을 보는 때가 있다. 어떤 이야기는 ‘지나간 일’을 ‘지나가지 않은 일’로 바꾸기를 꿈꾸며 심지어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속이려는 시도도 서슴지 않는다.
수잔 스튜어트의 ‘갈망에 대하여’는 인간 욕망의 구조가 어떻게 서사에 새겨지는가를 탐구한 독창적이고도 난해한 문화연구서다. 이 책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는 시인이자 비평가로, 영문학과 인류학을 전공하고 시학으로 석사학위, 민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양한 관심사와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미니어처’, ‘거대한 것’, ‘기념품’, ‘수집품’ 등 네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일상의 사물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특정한 모습에 생명을 불어 넣는 방식을 포착한다.
본격적인 분석 전에 언어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서사의 도구인 언어에 대해 저자가주목하는 것은 기호라는 특징이다. “기호의 자의적 속성은 낱말과 사물의 관계 내에서 성립될 수도 있으나, 이는 사회적 실천 행위에서 비자의적 관계로 변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호의 자의성을 교환가치의 자의성과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교환가치에는 상품의 물질적 속성이나 상품이 형성되기까지 투입된 노동의 양과는 아무런 본질적 연관성이 없으나, 그 가치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보면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저자는 언어를 자본주의 사회 내 상품에 비견한 마르크스의 말을 받아 들여 언어의 자의성을 의심한다. 더불어 일상 언어는 일상의 필요에 밀착해 있고 시적 언어만이 기표(記標)와 기의(記意) 사이에서 자유롭게 떠 있다는 믿음을 부인하며, 애초에 모든 언어는 지시체에 제대로 얹혀지지 못하고 미끄러질 운명이라고 설파한다. 즉, 언어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지시하지 못할 팔자를 타고났으며 이 핸디캡을 고스란히 안고 사실상 “발화라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 행위” 안에서 기능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갈망은 언어의 이 불완전성에서 싹튼다. 저자는 기표와 기의, 혹은 물질성과 의미의 관계가 탄생하는 지점과 초월되는 지점이 갈망의 서사가 닿고자 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모든 서사에서 드러나는 노스탤지어, 즉 기원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물이 기념품이다. 엽서, 사진, 코르사주에서 떼어낸 리본, 에펠탑 모형 같은 기념품은 물리적 축소와 서사를 통한 의미 강화를 이용해 특정한 순간을 하나의 물질 안에 보존한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실재성이 달아나버린 사건들, 그리하여 이제는 이야기 속에서 꾸며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 기념품이 훌륭한 흔적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념품은 갈망이라는 언어를 통해 원본의 맥락에 말을 건다. 기념품은 필요나 사용가치 때문에 생겨난 물건이 아니라 노스탤지어라는 충족될 길 없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책상 위 에펠탑 모형을 가만히 들여다 보라. 그것이 조악하면 할수록, 진짜 에펠탑과 다르면 다를수록, 진짜와 가짜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구매자의 추억은 더 강하게 발동된다. “내면과 외부, 주체와 대상,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가 바로 서사”이기 때문이다.
서사와 욕망과 사물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관련 사안들에 대해 수없이 갱신된 사고 위에서 탄생한 것이라 독파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심리학과 철학, 시의 돋보기를 동시에 들이대야만 보이는 지점이란 것을 감안하면, 이것이 가능한 유일한 서술 방식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화될 때까지 그저 찬찬히 씹어 먹을 수 밖에.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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