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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훈 정치'의 나라

입력
2016.01.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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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창당을 준비 중인 안철수(오른쪽) 의원이 한상진 공동창당준비위원장과 함께 지난 12일 오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민의당 창당을 준비 중인 안철수(오른쪽) 의원이 한상진 공동창당준비위원장과 함께 지난 12일 오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갔을 때다. 일행 중 일부가 바딘 광장에 안치된 호찌민 시신을 보러 갔다. 넓은 광장에 신전처럼 홀로 우뚝 서있는 호찌민 묘소를 본 적은 있기에 동행하지 않았다. 1969년 삶을 마감했으나 육신은 여전히 참배객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는 호찌민의 박제를 보고 싶은 마음은 아예 없었다. 남다른 삶을 살다간 인물의 시신이 살아 남은 자들의 통치에 활용되는 상황이 마땅치 않았다.

공산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지도자들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 전시해 왔다. 세계 최초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건설한 블라디미르 레닌을 시작으로 그의 후계자 이오시프 스탈린, 중국의 국부 마오쩌둥도 미라가 되어 후손들을 만나고 있다. 호찌민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 베트남 곳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그를 이어 들어선 불안정한 집단지도 체제는 그의 시신을 국가 전시물로 만들었다.

부자 모두 방부처리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김정일은 가장 소름 끼치는 경우다. 김정일은 생전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을 뿐 공식적인 국가원수인 국가 주석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김정은도 닮은 꼴이다.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북한을 지배하고 있다. 여러 역학관계를 고려한 선택이기는 하겠지만 아버지보다 반 단계 낮은 지위다. 미라가 된 아버지(그리고 할아버지)의 권위에 의지하고 죽은 자들의 유지에 기댄, 이른바 유훈 통치를 하다 보니 선친의 자리를 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헤어스타일과 복장 등으로 권위를 세우는 김정은의 모습을 보면 북한에 과연 미래라는 단어가 존재하는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어떤가. 전임 대통령은 곧잘 ‘라이방’을 쓰고선 대선에서 표 몰이를 했다. 개발연대 시대의 향수에 기댄 ‘추억팔이’ 마케팅이었다. 현직 대통령은 아버지의 후광에 기대 정계에 입문했고, 아버지의 ‘음덕’이 지지율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다음 권력을 노리는 정당 지도자들이나 국회 입문을 목표로 한 신인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다. 총선을 앞두고 탈당과 신당 창당이 동시에 진행되며 혼돈에 빠진 야권에서는 ‘참배 정치’가 제 철을 맞았다. 여러 유력 정치인들이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천명한다. 세상을 떠난 전 대통령의 유지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를 이어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오해를 살 필요 없이 그저 죽은 자들의 권위에 기대 지지율을 높이고 싶은 속내가 엿보인다.

살아있을 땐 조언조차 구하지 않았던 정치인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이 정치적 적자였다며 앞다퉈 나섰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정계를 떠난 지 오래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 느닷없이 생일 축하 편지를 보냈다. 3김 시대의 2막이 열린 분위기다. ‘노무현이 선택한 인재’라는 식으로 자신을 알리는 신인 정치인을 보고 있자면 한국은 혼령들이 다스리는 나라임이 분명하다.

나라 밖을 보자. 대선 후보 선출 경쟁이 한창 진행 중인 미국에서 죽은 자들을 호출하는 후보는 없다. 로널드 레이건의 치적을 언급하거나 빌 클린턴의 업적에 기대는 식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하지 않는다. 현안과 미래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쏟아내거나 라이벌을 향해 비판의 화살을 날릴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경선 후보의 막말을 듣자면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미국 사회가 얼마나 망가질지 가늠할 수 있다. 버니 샌더스 민주당 경선 후보의 급진적인 발언은 그가 당선된 뒤 미국사회가 맞을 격변을 예상케 한다. 숨진 대통령의 업적을 칭송하는 국내 정치인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이 마음에 품은 한국의 미래는 어떠한지 도통 알 수 없다.

정치인들이 죽은 자들을 앞세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내세울 정책이 없거나 자신이 품은 비전에 자신이 없어서다. 현재를 고민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없으니 과거에 매달린다. ‘유훈 정치’가 횡행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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