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학자 조반니 아리기는 현 시대가 처한 정치경제적 기원을 찾아 나선다. 역사를 변화의 연속으로 보고 변화에 시선을 두기보다는 장기 지속하는 구조와 그 속에서의 국면에 초점을 맞추는 아날학파와 세계체제 이론의 우산 아래에 있는 아리기는 1600년대의 제노바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시작을 찾아낸다. 간단히 말해 우리 시대는 500년 전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은 ‘장기 20세기’이다. 20세기가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20세기에 만든 틀은 앞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치며 지속할까? 새로운 세기를 맞은 지 불과 16년밖에 되지 않은 지금 이를 속단하는 일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20세기에 21세기는 꽤 먼 미래였다. 새천년의 시작은 단순히 해가 바뀌는 것 이상의 변곡점이 될 것 같았다. 199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오랜 예언 등 온갖 음모론이 난무했었다.
대중문화에서도 2015년 정도면 꽤 다른 세상일 것이라는 공상을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은 미래였다. 1985년에 시작된 ‘백투더퓨처’ 시리즈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2105년에 도착한다. 당시로는 30년이나 뒤였기에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했지만, 실제 2015년은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와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1985년에 가깝다. 1995년 일본에서 방영된 이래 여러 파생 문화상품으로 이어진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상상하는 미래도 2015년이다. 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따르면, 작년은 사멸에 이를 운명인 인류의 진화를 보완하는 인류보완계획이 시작되는 원년이기도 하다. 이런 SF의 상상과 달리 지금은 1980, 9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마션’이 그리는 시대는 2035년이다. 화성에 인간이 상주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미래이기는 하지만, 이 화성인들이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듣는 노래는 1970, 80년대 디스코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보위이다. 극중 등장인물들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20세기의 음악인 것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설정을 지나치게 따지고 들 필요는 없지만 현재의 징후를 읽어낼 단서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2016년 현재 우리는 회고와 추억 이상으로 지난 세기에 기대고 있다. 20세기를 수확하며 지낸다고 해도 좋다. 이어질 20세기 인물의 부고를 접하며 우리는 한동안 20세기를 더 소비할 것이다. 음악과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나 경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세기라는 곳간이 여전히 풍성한 곳도 있겠지만 한국은 아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유럽문명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새로운 창작의 씨앗으로 삼는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여유는 우리에게 호사일 뿐이다. 1997에서 시작한 드라마 ‘응답하라’가 1988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한국 사회는 거의 발기부전인 87년 체제 이후를 모색할 의지와 여력을 상실해버렸다. 20세기 특유의 역동성은 사라진 채 사회적 계층은 점차 화석처럼 굳어져 가고 있다. 지난 세기 인구와 경제가 다같이 증가하던 때에 맞추어 설계해놓은 연금 및 사회보장 시스템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지만 막연하게 낙관하며 수수방관 중이다.
역사가 일직선은 아니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늘 어느 정도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지만 한국 사회는 20세기의 숙제를 미뤄둔 채 20세기를 지나쳐버렸다. 여성과 타자에 대한 보편적 인권 감수성, 민주주의의 기본 덕목, 과학적 합리성과 세속성 등 이미 학습하고 체화했어야 할 것들이 여전히 소화불량이다. 이런 말만 들어도 근대의 억압이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는 ‘불가역적’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가치다.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들 없이 이어지는 20세기는 깨지 않는 악몽이 되기 십상이다. 강요된 응답을 요구 받은 과거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퇴행뿐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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