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언저리를 살다 보니, 한 세대가 스러져 가는 풍경을 보고 있다. 근년에 들어 93세 어머니가 가시는 건 자연의 순리려니 했었다. 뒤 이어 두 살 아래 남동생이 가나 했더니, 순하디 순한 언니가 죽을 때는 어이 그리 암팡지게 칼로 무 자르듯이 세상과 등지는 모습도 봐야 했다. 그 어간에 한 세트처럼 지내던 친구 셋이 나만 남겨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 버렸다. 망연자실하고 있는 사이, 남편마저 지난해 4월, 마치 급행열차를 타고 떠나 가듯이 가 버렸다. 어미가 이러한 형편이니, 옆에 사는 딸이 전에 없이 홀로 사는 어미를 이리 저리 보살펴 주고 있다. 근데 나의 DNA나 내 건강상태나 뭐를 보더라도, 내가 아무래도 100세 장수인들 중 한 명으로 뽑힌 것 같은 찐한 예감이 온다.
100세시대가 올 거라는 전망이 나온 건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어느새 100세시대가 진짜 와 버렸다. 100세 장수시대! 인류가 갈망해 오던 원초적 본능인 죽지 않고 오래 살고픈 욕구가 얼추 채워지려나 보다. 과학은 불과 지난 일이백년 사이에 모든 인류의 욕구와 편리에 기여해 왔다. 드디어 목숨 줄마저 100년 넘게 이어가게 해 주고 있다. 몇 십년 전 사람들보다 우리는 거의 두세 배를 더 살고 있는 셈이다.
근데 말이다, 사람이 100세가 넘도록 오래 살게 된 걸 마냥 좋아하고만 있어도 되려나.
더구나 나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윗세대와 동년배들이 떠나간 자리에 나 홀로 뽑혀서(?) 백살을 사는 게 과연 좋아만 할 일일까. 노인네 걱정은 팔자라지만, 아닌 게 아니라, 백살을 산다니까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중ㆍ고교 시절 배웠던 ‘질량불변의 법칙’은 비단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목숨 줄도 질량이 다 채워지면, 세상 어떤 명의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목숨이란 일생에 쓸 질량을 채우고 나면, 끝이 나기 마련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행복도, 의무도, 효도 아니 ‘부모 돌보기’에도 총량이 있어서 그 질량을 다 채우고 나면 끝을 내려고 한다.
사실 거칠고 야박스레 계산을 해보면 우리네 부모들은 자식들을 한 20여 년 키워 왔다. 하지만 백살을 살게 된 우리네 부모들은 100세 말년엔 30, 40년을 자식들로부터 소위 ‘효도’ 혹은 ‘돌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목숨 줄은 남아 있을 것이다. 100세 부모를 돌보는 자식들도 늙을 텐데, 한평생 쓸 수 있는 ‘효심 총량’이 다 해 가고 있을 텐데, 100세 부모들의 목숨 줄은 하염없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100세 삶이란 청장년기가 길어지는 게 아니라, 노년기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일찍이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여사는 “앞으로 인간은 36세만 넘어도 지구라는 행성에 새로 이민 온 사람처럼 모든 걸 새로 배워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사이래 첫 번째로 100세시대를 맞는 우리는 인간관계 특히 자식과의 관계를 새로 배우고 정비해야 하는 것이 제1순위로 할 일이다. 효심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가 자연히 사어(死語)화 될 조짐이 보인다. 개인적 차원의 효심 혹은 효도는 공동체적 윤리나 휴머니즘문제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내 딸의 효심총량이 소진되어 지치게 될까 봐 나는 백살을 사는 게 걱정스럽다. 자식들 효심의 총량이 고갈돼서 힘들지 않게 해 주는 것이 100세 부모들의 할 일이다. 이게 바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해 줄 ‘역 효도’다.
‘진짜 걱정꾼들이 가장 철저한 일꾼이고 사려 깊은 벗’이란다. 걱정도 팔자라서 하는 걱정이 아니라는 얘기다.
100년을 살자니, 내가 태어나던 100년 전에 살던 방식 그대로 지금을 살 수가 없는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무릇 생명은 세포가 죽고 이어서 새로운 세포가 생기므로 생명이 이어지듯이 세상은 자꾸만 변하고 새로워져야 하는데, 우리 나이 먹은 사람들만 태어나던 그 때, 그 시절의 살던 패턴대로 살아 가면, ‘수구 골통’소리 들어 마땅하다.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고광애(79)씨가
‘삶과 문화’에 3주에 한 번 노년문제에 천착한 글을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고씨는 임상수 영화감독의 어머니이기도 하며 책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2006) ‘나이 드는 데도 예의가 필요하다’(2015) 등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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