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 노역에 동원했던 일본 기업들은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징용피해자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임금 대부분을 강제로 우체국에 저축하게 했다. 예금 일부는 부족한 전쟁 비용을 메우는 용도로 쓰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일본 패전 후 이를 돌려받지 못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우편저금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논의에 오르지조차 않았다. 정부는 예금이 있는 사실조차 몰랐고, 일본은 알았지만 숨겼다.
▦ 잊혀졌던 우편저금의 존재가 알려진 건 2001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를 만들면서였다. 피해자 20여명이 일본 우정성에 우편저금 현황을 의뢰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정부는 청구권 협정으로 종결된 사안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문제를 제기한 20여명에게만 푼돈을 지급해 봉합했다. 정작 발벗고 나선 건 일본인이다. 우에다 게이시라는 시민운동가가 백방으로 뛰어 일본의 유초(郵)貯)은행에 강제징용 피해자 통장 수만 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 우정성이 1950년대 각 기업에서 통장을 제출 받아 유초은행을 통해 관리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 시기에 남은 돈 7억7,271만엔(약 79억 원)을 전후 70년 만에 국고에 귀속시킨다고 한다. 1944ㆍ45년 식민지배 과정에서 마련한 자금을 정부 예산에 편입하기 위해 당시 결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조선총독부 예산 외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우편저금과 보험, 지난 70년 동안 붙은 이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한 우편저금은 조선인과 대만, 사할린, 오키나와 등의 노무자와 군무원을 포함해 총 1,936만개다.
▦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강제지용 피해자들의 우편저금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회신이 없다며 수수방관해왔다. 그나마 이 일을 맡아온 ‘일제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희생자 지원위원회’가 지난해 12월 말 활동 기한 만료로 사라졌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기간 연장과 상설화를 요구했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최종적ㆍ불가역적’ 종결을 선언한 정부에 강제징용 우편저금 해결 기대는 언감생심이다. 졸속 협상이 과거사 문제까지 어둡게 하고 있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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