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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한국에는 트럼프 현상이 없을까

입력
2016.01.1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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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10일 네바다주 리노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유세에 참석한 지지자들이 트럼프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다.리노=AP 연합뉴스
10일 네바다주 리노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유세에 참석한 지지자들이 트럼프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다.리노=AP 연합뉴스

지난해 여름까지도 2016년 미국 대선은 ‘대통령 집안간의 싸움’이 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전 대통령 부인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지낸 아버지와 형을 둔 젭 부시 전 플로리다주지사의 대결이란 것이다. 특히 젭 부시가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을 통과하고,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 재선 후 민주당 후보가 또 당선된 경우는 1945년 헤리 트루먼 이후 없었기 때문이다.

젭 부시는 민주당 표밭이던 플로리다에서 주지사 재선에 성공하며 초당적 이미지도 갖췄다. 2008년과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의 대항마로 출마하라는 공화당 내 요청을 고사하고 재야에서 내공을 쌓으며 2016년을 기다려왔다. 지난해 그가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 선언을 하기 이전부터 당내 최고 선거 브레인들이 그의 진영에 몰려들었다. 이들이 만들고 싶었던 대선 구도는 ‘무능하고 부패한 워싱턴 정가 인물과 이에 맞서는 때묻지 않은 재야’였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준비하고 기획된 ‘젭 부시 대통령 만들기’는 지난해 6월 15일 출마 선언 바로 다음날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16일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불법 이민을 두고 “이들은 성폭행범이고 마약 범죄를 가져오고 있다, 남쪽 국경에 거대한 방벽을 쌓겠다”는 폭탄발언과 함께 출마 선언을 하자, 젭 부시의 출마가 순식간에 잊혀지고 말았다. 당초 젭 부시 진영은 테드 크루즈 텍사스주 상원의원 같은 워싱턴 정치인을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부시 전 주지사를 기성정치권에 대항해 ‘민초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려 했으나 그 자리를 하루 만에 ‘TV 리얼리티쇼 스타’ 트럼프에게 빼앗긴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3,100㎞에 방벽을 쌓겠다’는 약속은 진시황 같은 전제군주나 할 수 있는 발상이다. 그런데도 미국 유권자 상당수가 이 공약을 지지한다. 이런 우화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면에는 복잡한 현안에 대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해결하려는 진지한 자세를 비웃는 반지성주의와, 선거를 이미지 전쟁으로 타락시킨 미국 선거풍토가 자리잡고 있다. 트럼프가 허황된 공약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가장 큰 무기는 단순한 단어의 반복이다. AFP가 지난달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후보 토론회 때 트럼프의 발언을 분석한 결과 세 음절이 넘는 어휘를 사용한 비율이 7%에 불과했다. 주로 사용한 단어가 좋다(Good) 나쁘다(Bad) 어리석다(Stupid) 대단하다(Great)였다. 아홉 살이면 충분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을 사용해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전세계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겠다”는 호언장담만 반복하며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교수는 이런 상황을 “2000년 대선에서 정책논리 대결을 피하고 조지 W 부시의 친화적 이미지 전달에만 주력해 성공을 거둔 공화당의 감성 중시전략이 결국 업보가 돼 돌아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감각적 메시지로 유권자를 현혹시켜 승리를 얻어온 공화당의 얕은 꾀가 결국 트럼프라는 괴물을 키워, 공화당뿐 아니라 미국의 민주주의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경고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실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30년도 채 되지 않아 위기진단을 받고 있는 것에도 트럼프 현상과 흡사한 면이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이다. 박 대통령의 말은 트럼프와 달리 문장이 길고 장황하다. 비문도 많아 정확한 의미 해독이 힘들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말뜻을 쉽게 알아 듣는다. ‘진실한’ ‘혼이 비정상’ ‘절박’ 등 대통령이 사용한 수식어를 통해 말의 의미보다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 지시의 내용보다 그 말에 담긴 감정에 좌우되다 보니 현 정부 정책에 대해 차분한 토론은 사라지고 여야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감정적 단어가 우세한 사회에서 민주적 토론이 작동하기는 불가능하다. 총선을 거쳐 대선으로 이어지는 본격적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는 시점에 마음이 무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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