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2월의 일이다. 일본 제12사단이 서울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용산 일대 약 300만 평의 군용지가 일본군 주둔지로 강제 수용됐다.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한국인은 이 땅을 되돌려 받지 못했다.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미군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 24군단 예하 제7사단 병력이 1945년 9월에 이곳으로 진주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의 두 번째 십 년 대에 이를 때까지, 용산기지는 서울 한복판의 외국 땅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난 100년을 통틀어 극동아시아에서 가장 기구한 질곡의 역사가 용산에서 벌어졌지만, 언제부터인가 서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망각을 강요 받고 기억상실증에 체념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만연하기 때문이다. 100년의 역사는커녕 한두 해 전에 벌어진 사회적 비극조차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사회다. 시민들에게 절실한 문제는 역사보다 생계일 테지만, 역사를 모르는 기억상실증의 사회에서 나쁜 정치와 사악한 권력이 군림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그 자리에서 지난 세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공부한다는 것은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름 아닌 생계를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과거에 벌어졌던 그 일이 바로 그 자리에서 또다시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군 주둔지로 용산 일대가 강제 수용되던 과정에서 벌어졌던 무참한 폭력과 부조리는 2009년 용산 참사의 비극을 낳았던 용산국제업무지구 조성 사업을 생각나게 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이 땅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혹하다.
향토사학자가 메운 용산 연구의 공백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제도권 학계 바깥에 있는 시민은 역사를 어떻게 공부할 수 있을까? 향토사학자 김천수(38)는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일의 즐거움과 사명감을 알려줬다.
김천수는 지난 20년 동안 용산 지역 향토사와 군사사, 한미일관계사 연구를 수행해온 독학자다. 긴 시간 자가발전해온 성과를 모아 2014년 7월에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용산구청 발행)라는 책을 내기 전까지 그의 공부는 외부에 알려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러일전쟁 이전 시기부터 1953년까지 용산 역사를 다룬다. 일제의 군사 전략에 따라 용산기지에 주둔했던 일본군 주둔 형태의 변화 과정, 기지 내 각 부대 및 주요 시설 현황, 파견군에서 상주군 체제로의 변화 속에서 일제 조선군사령부 창설 과정, 일제 패망 이후 미군과 용산기지 사이에 새로운 역학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사진과 각종 도표를 망라해 정리했다.
이 책의 성과는 학계에도 의미심장하다. 용산기지 내 조선군사령부와 그 예하 부대 및 주요 군사시설들이 어느 위치에 어떤 형태로 배치되었고, 그 기능과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또 그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토록 상세히 밝힌 연구는 그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용산기지에서 실제 근무한 공무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구였다.
용산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용산기지 체험이 주요했다. 그는 전문 연구자 못지않은 성실한 태도로 용산을 공부했다. 일제시기와 해방정국 당시의 1차 자료를 모으고 수없이 답사를 반복해 용산 연구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던 부분을 채웠다. 그것도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끈질기게 이어온 일이다. 하지만 석ㆍ박사 학위가 없는 김천수는 학계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 사실에 대해 그는 조금도 섭섭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산을 연구한 학계의 연구사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을 감사히 여겼다.
독학에서 다 함께 하는 시민 연구로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에서 김천수가 자신을 어떤 독학자로 정의하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을 찾았다. 그 동안 학계에서 용산과 용산기지 연구가 부실했던 까닭을 논평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어떤 공부를 해나갈 것인지 방향과 정체성을 밝힌 대목이기도 하다.
“용산기지가 해방 이후 단순히 주한미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선입견의 작용과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원인이었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필자는 역사를 전문적으로 전공한 역사학도가 아닌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시민이자 향토사학자로서 향후 용산기지 이전과 용산공원 조성에 앞서 ‘용산기지의 잊혀진 역사’를 학술적으로 조명해 보려는 시도로 본 책을 집필하였다.”
용산 연구로 이룬 성과도 훌륭하지만 ‘시민’의 정체성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해 보였다는 점에서 김천수의 독학은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다가올 봄에 퇴직한 뒤에는 용산문화탐방을 비롯해 시민 대상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한다. 용산의 문화유적지를 시민들과 함께 걸으면서 오랜 시간 공부했던 것을 남김없이 나누겠다는 포부였다. 이십여 년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수행해온 공부가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될 때가 머지않아 보였다.
그에게 ‘독학’이란 ‘함께 공부할 시간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어떤 이가 학계 바깥에서 생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공부에 시간을 쏟고자 할 때, 누군가가 마중을 온다면 큰 힘이 된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이를 지도하고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의 극치는 정보의 양이나 시험 성적이 아니라, 너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함께 궁금해하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우선 지적인 열기에 어느 한쪽이 먼저 뜨거워져야 한다. 호기심에 들뜰 때의 간질간질한 관능, 앎과 배움을 향한 열망을 퍼뜨릴 에너지를 축적하는 독학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일은 시민의 일상에서도 가능하다. 함께 공부할 시간을 준비하는 또 다른 시민 독학자들에게 김천수의 독학이 용기가 되길 바란다.
재개발로 기지의 역사 지워져선 안돼
2016년과 2017년은 용산 지역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다. 내년 12월에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이 완료될 것이다. 반환된 용산기지 자리는 용산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발표된 계획안대로라면 이곳은 탈역사화된 공원으로 뒤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강제된 기억상실증의 전형적인 수순을 밟고 있다. 용산기지 반환 과정에서 이곳의 역사를 진지하게 되돌아볼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용산을 둘러싼 개발업자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이 땅을 둘러싼 온갖 이해관계가 그런 시간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빨리 돈이 될 사건이 터지기만 학수고대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라고 이들과 크게 다를까? 경제와 개발 논리에 갇히지 않고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공부가 용산과 이 시대의 시민들에게 절실하다.
김천수는 용산기지의 역사가 사진이나 문서로만 남아선 안 된다고 했다. 2002년에 그가 용산기지에 첫발을 디뎠던 주한미합동지원단(JUSMAG-K) 건물은 일제 조선군사령부 시절에는 장교 합동숙소였고, 해방 정국에선 미소 공동위원회의 소련군 대표 숙소로 쓰였고 국군 창설의 산파역을 했던 미군사고문단(KMAG)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이태원로 위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너머 메인 포스트에 위치한 미군 충혼탑은 본래 일본군 충혼탑이었다. 한때 미 8군 클럽으로 쓰였던 드래곤힐라지(DHL) 호텔은 일본군 사령관 관저가 있던 곳이었다. 미군은 일본군 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가능한 재활용하는 원칙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 때문에 복잡다단했던 지난 역사의 흔적이 지금도 용산기지 전체에 남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천수의 용산 연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용산기지에서 되찾아야 할 것은 투기꾼을 위한 돈놀이 판이 아니라 역사다. 아픈 역사도 외면해선 안 될 소중한 역사다. 수치스러운 역사도 온전히 기억되고 철저히 성찰할 수 있다면 후손에겐 힘이 되는 유산이다. 그러니 용산기지 반환과 공원화 계획은 이곳의 역사를 밝히는 과정으로 정향되어야 한다. 김천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과 기록이 아닌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야 하는 안타까운 시대가 오기 전에 용산과 용산기지의 역사적 정체성을 세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를 독학자로 내버려둬선 안 되겠다. 그의 공부에 더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하길 바란다.
임태훈ㆍ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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