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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담대하게 내리막을 향해서

입력
2016.01.0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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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품는 일이 위험한 시대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아름다운 잠언은 모욕에 가까운 말이 되어버렸다. 그저 별 일 없이 살아남는 것만이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희망이 되었다. 그래서 새해를 맞아도 특별한 희망을 갖지 않게 되었다. 다만 새해에는 조금 더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살고 싶다.

지난 해 나에게 휘몰아친 경제적 쓰나미에 나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만만찮은 체구도 무용지물이었다.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며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일의 비장함을 깨쳤다고나 할까.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메르스와 전세난에 정통으로 강타당했다. 전세금을 마련하지 못해 더 좁은 집으로 옮겨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불면증과 함께 감정의 추락이 찾아왔다. 감당하기 힘든 사고를 겪은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감정의 여러 단계를 나도 거쳤다.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부정,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싶은 분노, 나를 바꾸겠다는 타협, 그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우울, 마침내 한 시절이 갔다는 것을 인정하는 단계를 거쳐서야 내 흔들림은 잠잠해졌다. 그 시간 동안 다른 방식의 삶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제는 하기 싫은 일도 하면서, 싫은 사람도 웃으며 만나면서 살아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어울리지 않게 착하고 순하게 살아볼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금세 그런 욕망을 내려놓았다. 인간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게 되었다. 남들보다 충만한 세월을 보냈으니 이제는 그 추억으로 살아야 하는 날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해는 지난해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이제부터의 인생은 내리막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체력도, 지력도, 감수성도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갈 것이다. 올라가는 건 물가와 내 몸무게뿐인 날들일 것이다. 나이 마흔을 넘긴 이들이라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괜찮은 회사의 정규직으로 일한다 해도, 버팀목이 되는 자식들이 있다 해도 그들 또한 인생의 화양연화는 지나갔음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결국 스스로 선택한 삶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는 가지 않은 삶에 대한 저마다의 결핍이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여행이나 다니며 사는 싱글의 삶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불안한 중년에 다름없는 나 자신처럼 말이다.

자유를 선택한 대신 나는 늘 가난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가난해도 우아하게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우아한 삶이라는 건,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를 아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기보다 충분히 가졌음을 자각하는 삶, 나보다 덜 가진 이에게 미안해할 줄 아는 삶이다. 우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건 적금 통장이나 시골의 땅이 아니다.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만드는 벗들의 존재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 이런 사회에서 가족이 없는 싱글은 우정과 연대에 기대어야만 한다. 작년 한 해를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벗들의 격려 덕분이었다. 네루다의 시처럼 누군가 터널처럼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 나도 외롭다고 고백하며 그이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

나는 종종 ‘여자 사람 싱글’ 친구들에게 말하곤 한다. 언젠가 ‘쉐어 하우스’ 말고 ‘쉐어 가든’을 짓고 모여 살자고. 어차피 다들 형편도 비슷해 혼자서 땅 사고 집 짓는 일은 언감생심. 대여섯 명이 함께 땅을 사 작게나마 독립공간을 보장해주고, 마당을 공유하며 사는 게 오히려 현실적이다. 누군가 아프면 죽을 끓여 주고, 누군가 여행을 떠나면 반려묘도 돌봐주고, 함께 텃밭을 가꾸며, 달 밝은 밤이면 마당에 모여 춤도 추면서 살고 싶다. 인생의 내리막길을 벗들의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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