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되면 ‘답다’라는 말이 되뇌어지곤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굳이 대자면 한 살 더 먹었다는 정도, 그렇다고 철이 더 든 것도 아니요, 앎이 더 깊어진 것도 아닌데 자못 진지한 화두로 머리가 묵직해지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어른답게 사는 것일까’ 등등.
물론 고전을 들쳐보면 나름 답을 구할 수 있다. 가령 공자는 나이 서른이면 설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른 살을 ‘이립(而立)’이라 칭하는 이유다. 그런데 서른 살이면 적어도 생리적으론 어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여 이에 따르면 어른다움이란 곧 ‘서 있음[立]’이 된다. 문제는 선다는 말의 뜻이 알 듯 말듯 하다는 점이다. 그간 앞뒤 문맥을 따져 서다의 뜻을 밝히려 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이 구절 앞뒤에는 열다섯이 되면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의 “지우학(志于學)”과 마흔이면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의 “불혹(不惑)”이 나온다. 이들을 연동시키면 “학문적으로 자립하다” 정도를 서다의 구체적 뜻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이 해석만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공자가 어른다움과 학문하기를 연동시켰음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어른다우려면 학술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지니되, 남의 지식으로만 나를 채우는 단계를 넘어 나만의 지식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공자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의 세계가, 지식이 자본의 원천이 되는 지식기반 사회이어서 만은 아니다. 무릇 어른이라 함은 남을 가르칠 정도의 학식은 있어야 한다는 케케묵은 관념 때문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 말을 통해 어른다움을 갖추는 길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에 책 한 쪽 읽기도 어려운 형편에 자기만의 지식을 갖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반쯤은 틀린 말이다. 학문이라고 하면 뭔가 고도의 지식이 요청된다는 식의 생각이 꼭 맞는 말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는 도리어 정반대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집 안팎을 쓸고 닦으며 오가는 사람과 문안을 나누는 것이 학문하기라고 단언했다. 어떤 고차원적 진리탐구보다는 일상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를 생각하고 풀어가는 것 자체가 학문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남을 가르칠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답다고 보지도 않았다. 서른이 되어 설 수 있다[三十而立]는 말은, 그래야 어른으로서 남을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세 명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곤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선한 이를 가려내어 그를 본받고, 선하지 못한 이가 있으면 내게도 그러한 바가 있는지를 살펴 바로잡는다.” 따라서 동행이 모두 악한 자라 할지라도 공자는 그들로 인해 배우는 바가 꼭 있게 된다. 그들의 나쁜 점을, 나를 개선해가는 계기로 활용할 줄 알기에 결과적으로 항상 배우게 된다.
부정적 대상을 마주했을 때 고쳐주고자 나서는 대신 돌이켜 이를 자기 강화의 계기로 삼는 태도, 이렇듯 공자는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대신에 배우고 또 배우려 했다. ‘스승 되기’를 도모한 것이 아니라 ‘스승 삼기’를 줄곧 실천했음이다. 하여 서른이면 서야 한다는 언급은 ‘마흔-불혹’과 ‘쉰-지천명(知天命)’ 곧 천명을 아는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배움의 조건을 언급한 것이지, 젊은이를 훈도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상에서 자기 연마를 꾸준히 행함으로써 나이가 쌓일수록 자기를 제고시켜 가는 것을 어른다운 삶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건건이 공자를 비판했던 장자조차도 어른다움의 조건에 대해서만큼은 공자와 뜻을 같이했다. 아니 더 신랄하게 그렇지 못한 어른을 몰아붙였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세상사 이치와 경중을 뒤에 올 이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다면 선배가 아니다. 사람이면서 선배가 되지 못한다면 그에겐 사람의 도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면서 사람의 도를 지니지 못한 그런 사람을 일러 썩은 사람(陳人)라고 한다.” 여기서 ‘썩은 사람’을 공자의 용어로 바꾼다면, ‘그 이름이 칭해지지 않는(無聞) 사람 정도가 된다. “후생은 가외”이지만, 나이 “마흔, 쉰이 되어서도 그 이름이 칭해지지 않으면, 그런 이들은 두려워할 만하지 못하다”는 공자 말 속의 중년, 장년들 말이다.
새해 벽두여서 그런지 ‘청년에게 고함’ 유의 글을 이곳 저곳서 접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더 없는 ‘헤븐(천국)’이지만, 대다수 청년에겐 ‘헬(지옥)’인 우리의 현실을 감안하건대, 청년을 주목함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든, 심지어 혼내든 말이다. 반면에 중년, 장년 그리고 노년에 대해 고하는 글들은 별로 없다. 청년에겐 그렇게 ‘무문(無聞)인 진인(陳人)’이기 때문일까…, 여러 모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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