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부천시의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열렸던 이상무 화백 특별 전시 포스터
▲ 故 이상무 화백. 연합뉴스 제공
빈소에서 영정 사진을 마주했습니다. 진지하고 소탈하셨던 선생님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꿋꿋한 독고탁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선생님의 영면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선생님이 창조한 독고탁은 우리 국민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캐릭터 아닐까요? 저는 독고탁하면 '울지 않는 소년'(1979년 어깨동무 연재)이란 작품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키는 작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고 스스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작은 거인 독고탁. 장난꾸러기지만 인정과 순정이 넘치는 소년 독고탁.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 판치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 독고탁의 가치는 더욱 별처럼 빛납니다.
야구만화 '달려라 꼴찌'가 연재되던 1980년대 초반, 초등학생이던 저는 선생님이 창조한 '드라이브볼', '더스트볼', '바운드볼'에 열광했습니다. 독고탁이 온갖 마구로 무적의 타자 챠리킴을 요리하는 장면은 당시의 소년, 소녀들의 넋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선생님의 만화는 캐릭터의 절대 매력뿐만 아니라 기발한 요소들이 넘쳐났습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지난해 '달려라 꼴찌' 복간복을 펴냈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더군요.
빈소에서 유족 분들이 저에 대해 묻기에 "선생님께 신세를 진 만화인"이라고만 설명드렸습니다. 공개적 자리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셨지만 2012년 만화행사에서 허영만, 이현세 선생님과 함께 하는 야구 토크쇼 '마구톡'에 출연해달라는 저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3대 야구만화 작가인 세 분이 모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는 이현세 선생님의 말이 실현되어 가슴이 아픔니다.
독고탁은 많은 작품에서 고아 출신 스포츠선수로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로부터 '이상무 작가는 고아 출신'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사실 선생님은 팔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선생님 어린 시절(1946년 생)에는 고아원에 고아가 많았죠. 마침 선생님 동네(경상북도 김천)에도 고아원이 있었고, 선생님은 고아 친구들과 어울리며 고아들의 실태를 잘 알게 되셨죠.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감또깨이 입에 물고'라는 자전적 만화에 아주 자세하게 나오는데, 전 이 작품을 꼭 읽어보시라고 강추합니다.
선생님은 독고탁처럼 체격이 작은 편이었고, 운동을 잘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때 만화가 야구팀의 멤버였던 허영만 선생님은 "이상무는 공을 가지고 못 하는 운동이 없었다"고 증언했고, 선생님도 "당시 우리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은 야구 좀 한다고 하면 내야를 봤다. 저도 좀 해서 내야를 봤다"고 유쾌하게 말하셨죠. 선생님의 골프 실력은 만화계에서 '프로'로 통했고요.
선생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독고탁은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독고탁의 그 친근한 눈망울을 몇 세대 뒤의 후손들도 여전히 마주하고 있겠죠.
장상용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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