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참여와 대표성이다. 정당체제가 다양한 정치세력의 경쟁 공간을 마련하지 못할 때 정당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정치가 이념적 대척 세력을 배제한 중간 지대의 유권자를 대변하지 못할 때 정치 참여는 감소한다. 정치가 현재를 바꿀 수 없다는 실망은 투표율 저하로 나타나며 무당파의 증가는 참여와 대표성의 위기로 이어진다. 정치는 궁극적으로 기득권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정치적 수사는 코스프레로 변질된다.
헌법 1조 1항의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정체(政體)가 의미하는 바는 시민의 참여에 의한 정치다. 민주주의의 모든 제도는 참여라는 토대 위에 성립한다. 현 정당 체제는 기본적으로 참여를 확산시킬 수 없는 구조다.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과 개인의 욕구가 공존하고 이들 의견이 사회적 협의기구나 대표성을 담보하는 결사체에 의해 표출되어야 건강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거대 정당들의 독점 구도에 근거하는 양당 체제는 복잡다기한 시민사회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표출하는데 친화적이지 않다. 다양한 이해가 대표ㆍ대변되어어야 한다는 일반론에 충실하다면 의미 있는 다당 체제로의 변화는 이념의 차이를 넘는 당위에 속한다.
야권의 분열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총선과 대선을 전후한 정당의 이합집산은 한국 정치에서 낯설지 않다. 그러나 정당 체제의 분화가 의미를 가지려면 사회적 균열을 반영하는 체제로의 개편이어야 한다. 가속화되고 있는 제1야당의 탈당 추이가 총선에서 일여다야의 선거공학적 분열에 머물러 개헌선에 육박하는 거대 여당과 왜소한 야당 연대로 귀결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에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적 퇴행에 신물 난 중간 지대 유권자들의 지지를 흡수하여 양당 체제를 종식시킬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안철수 신당과 야권이 의미 있는 득표를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1992년 14대 총선 때 중도보수 통일국민당이 31석을 획득함으로써 당시 집권당이던 민자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 해 말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당 정체성을 상실한 채 거품정당으로 사라졌다. 4년 후 15대 총선 때는 김종필이라는 카리스마와 지역에 기반했던 자유민주연합이 50석을 얻는 기염을 토하고, 15대 대선 때 DJP로 공동정권을 차지했으나 역시 소멸했다. 결과는 지금의 거대 양당 체제로의 복귀였다.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으나 그만큼 한국 정치에서 다양한 정치세력이 정체성을 가지고 견제하고 길항하는 정당 체제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권력정치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공천 룰, 선거구 획정, 인물 영입과 물갈이 등이 정치 담론의 대부분을 차지하면 정치가 왜 문제인지에 대한 본질에 천착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소통의 부족과 공감의 부재가 사회적 원심력을 증가시킨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그런 사회적 간극은 필요악인 정치를 통해 메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사회적 갈등을 표출해 낼 정치 세력의 존재와 유권자의 정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인한 냉소는 선거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에 기초한다.
선거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될 때 정치 참여는 확대된다. 정반대 방향을 응시하는 강고한 유권자들의 지지에 입각한 거대 정당의 적대적 공존으로는 참여를 확대시킬 수도, 사회의 다양한 이해 관계를 반영할 수도 없다. 부패 청산, 기득권 내려 놓기, 세비 삭감 등이 정치 개혁의 본질로 둔갑하고,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오도된다.
사회의 소수가 대표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현재의 정당 체제는 결과적으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직간접으로 억제한다. 신당 출현이 조금이나마 자신이 대표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유권자의 참여 폭을 넓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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