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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유치 덕 되찾은 밤... 36년만에 족쇄풀린 야간통금

입력
2016.01.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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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1월 5일

82년 1월 4일, 야간 통금 36년 3개월 26일의 마지막 밤 서울 도심 풍경. 사진 속 승용차는 긴급 차량이거나 특권층 차량이었을 것이다. 자료사진.
82년 1월 4일, 야간 통금 36년 3개월 26일의 마지막 밤 서울 도심 풍경. 사진 속 승용차는 긴급 차량이거나 특권층 차량이었을 것이다. 자료사진.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풀렸다. 1945년 9월 7일 미군정청 포고령 이래 36년여 만에야 비로소, ‘밤비 내리는 영동교’도 하염없이 헤매 돌 수 있게 됐다. 주현미의 저 노래가 85년 나왔으니 신군부의 ‘결단’이 없었다면 노래가 저리 축축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 전까진 실연의 아픔도 시간 살펴가며 달래야 했다.

통행금지는 치안을 유지하고 재해나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 한해 한시적으로 실시되는 제도다. 미군정 포고령도 제한적 공권력으로 해방 직후의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에 한해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시작됐다가 한국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됐다. 정부는 55년 ‘경범죄 처벌법’으로 야간 통금을 강제했고, 61년부터 자정~새벽 4시로 완화됐다.

암살자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옥에 갇히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공동체의 치안을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그 사회를 감추고 격리시키는 것이다, 야간 통금은 밤의 사회를 아예 없애는 거였다. 술집도 시장도 당연히 문을 닫았고, 농ㆍ수산물 새벽 경매도 불가능했다. 시민들은 통금 전에 귀가하기 위해 매일 밤 교통 전쟁을 치렀고,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받고 벌금 내고 구치소에서 밤을 새지 않으려고 아예 직장 숙직실 같은 데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 불편과 기본권 침해를 분단국가의 시민으로서 감내해야 할 일로 여겼고, 시일이 흐르면서 점차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게 됐다. 64년 제주도, 65년 내륙인 충청북도 야간 통금이 해제된 것은 남파간첩의 야간 해상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거였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이 수립된 66년 수출관련 수송 수단과 일부 관광지의 야간 통금이 풀렸다.

전두환 정권의 통금 해제(제11대 국회 내무위가 81년 12월 10일 만장일치로 가결)는 사실 서울올림픽 덕이었다. 앞서 81년 9월 30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택했고, 정부의 통금 해제는 불가피했다. 역설적이게도, 무소불위의 군사독재정권이었기에 군부의 안보논리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거였다. 예외로 지정됐던 일부 지역- 휴전선 지역과 해안선 지역-의 통금까지 완전히 해제된 것은 올림픽이 열리던 88년 1월 1일부터였다.

밤이 열린 뒤 밤의 사회, 밤의 문화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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