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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편견을 벗어나 우리의 눈으로 이슬람을 바로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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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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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남동의 한국 이슬람교 서울 중앙서원에서 무슬림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서울 한남동의 한국 이슬람교 서울 중앙서원에서 무슬림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이슬람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다. ‘시대착오적이고 호전적이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한 종교이자 문화, 석유라는 알라의 은총으로 왕족들만 배 불리고, 끔찍한 테러로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광신적 종교집단.’ 이것이 한국인 눈에 비친 이슬람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최근 우리사회에 무슬림 이주민들이 증가하는 것도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과격 무장집단 이슬람국가(IS)가 테러 위협의 대상 중 하나로 우리나라를 지목하고, 국내거주 무슬림들이 테러단체에 가담해 추방되는 일이 생기면서 이슬람포비아(이슬람혐오증)도 늘어가는 추세다. 결국 한국에서 살고 있는 무슬림의 입장에서는 점점 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1970, 80년대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 근로자들이 중동사회를 직접 경험했지만, ‘건설’ ‘석유’라는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접근하는데 머물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는 이슬람연구에 대해서 가장 열악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주요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대인들의 입김으로 인해 서구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통해서 주로 이슬람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지적 편중도 심각한 수준이다.

또 일부다처, 명예살인, 여성억압, 신체 참수형, 테러 같은 일부 극단적 보수 이슬람국가의 악습을 이슬람 문화 전체로 보편화, 일반화하는 오류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일부다처는 물론 간통죄와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는 이슬람 국가, 여성 민선 대통령과 민선 여성 총리를 즐비하게 배출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 같은 이슬람 국가의 또 다른 모습들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다. 57개 이슬람 국가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 보다는 하나의 획일화된 이슬람의 이미지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중동은 한류가 거세지만, 한국은 무슬림 편견 팽배

반면 이슬람 세계가 가지고 있는 한국의 이미지는 긍정적이다. 열사의 땅에서 성실과 근면으로 사막에 고속도로를 놓고, 주택과 학교, 발전소와 담수화 시설을 만들어 오늘날 아랍의 부흥을 가져다 준 기적의 창조자로 한국인을 기억한다. 특히 2006년 이집트에 드라마 ‘겨울연가’가 상륙한 이후 10년간 한류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지속된다. 튀니지 남부 사하라 사막 지역인 토제르에서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대인기를 끌고, 이란에서 드라마 ‘대장금’은 6개월 평균 시청률 90%를 기록했다. 한국산 자동차. IT, 가전제품의 시장 점유율은 대부분 중동국가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독한 한국 짝사랑이다.

이슬람 세계의 한국사랑은 그들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과 비교해 본다면 더욱 확연해 진다. 많은 무슬림들은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침략적이며 문화적으로 타락한 국가로 간주한다. 가공할 첨단무기를 앞세워 약소국을 제멋대로 유린하고, 자신들의 과소비와 풍요를 위해 귀중한 제3세계의 자원을 헐값으로 약탈하는 나쁜 제국이라고 생각한다. 평화로운 지구촌을 어지럽히는 공적으로 여기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들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다민족 사회의 역동성,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와 성숙한 시민 사회의 역할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세계 최고의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국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미국의 매파들도 아랍과 이슬람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반문명적 종교 가치에 함몰된 악의 온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과 관용성, 자존과 전통을 중시하는 무슬림들의 정신적 고귀함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다.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을 앞세워 이슬람의 반문명성을 각인시키고 무슬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고 있다.

그 중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과정에 미국이 가장 적극적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무슬림들은 미국이 팔레스타인과 아랍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훼손된 자존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편협한 강대국이란 증오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는 다른 차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한번도 그들과 전쟁이나 갈등 같은 불편한 과거사를 갖고 있지 않다. 그 덕분에 아시아의 문화민족으로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최첨단 기술개발과 경제성장에 성공한 모범적인 나라로 한국을 우러러 본다. 그들이 닮고 따라가고 싶은 롤 모델인 것이다. 중동에서 한국 이미지는 세계의 어떤 나라보다 특별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한류 지속의 배경이다.

경제적으로도 지금도 에너지 원유의 85% 정도를 중동에서 들여오고, 중동 특수를 원동력으로 해서 우리 나라는 경제개발의 꿈을 성취할 수 있었다.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기업이 해외에서 수주한 건설, 플랜트 공사의 약 70%가 중동 시장이었고, 이 지역이 오늘날 우리 경제가 발전하는 단단한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품고 있는 적대적 이미지와 만연된 오해를 알게 된 아랍 지식인층은 서운함을 느낀다. 그들이 좋아하는 한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의 정서나 아픔을 이해주기는커녕 지나치게 친유대ㆍ친미 중심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터트린다. 에너지와 건설, 의료분야와 상품시장 등에서 긴밀한 상호관계를 증진해 나가면서도, 이슬람의 문화나 인문가치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포비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1,500년간 이어온 한국과 중동의 교류 재조명돼야

이제 지속 가능한 한류와 진정한 의미의 교류를 위해서는 일시적 현상만이 아닌 두 문화권을 이어주는 단단한 문화이해의 하부구조가 구축돼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와 중동-아랍간에는 1,500년이라는 오랜 역사적 교류와 문화적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는 일부터 시작돼야 한다.

마침 7세기중엽 페르시아 왕자 일행이 신라로 망명해 와서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신라와 사산왕조 페르시아간의 돈독한 우의를 다졌다는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인 ‘쿠쉬나메’가 최근 발견되어 학계와 문화 콘텐츠 분야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더욱이 18명의 아랍 학자들이 기술한 20여권의 아랍 역사서, 지리서, 백과사전에서 신라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아랍 상인들은 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해로를 통해 신라에 빈번하게 내왕했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은 귀국을 포기하고 신라에 눌러 살았다. 척박한 사막 오아시스에서 물과 초원을 그리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풍성한 먹을 거리, 광물과 금이 풍부한 신라야 말로 최고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신라를 사라져 버린 낙원 아틀란티스에 비유하기도 하고, 아무리 불치병 환자라도 신라에 오기만 하면 씻은 듯이 나아버린다고 기술하면서 한국의 쾌적한 삶의 조건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을 향한 아랍인들의 동경은 신라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고려초기에는 대식국(大食國ㆍ사라센 제국)이라 불리는 아랍 상인들이 수백명씩 사절단을 이루며 개성을 드나들었고, 몽골의 간섭을 받던 고려 말에는 한반도에 이슬람 집단 공동체를 이루며 모스크까지 짓고 살았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우수한 이슬람 과학기술과 유용한 첨단 정보를 우리사회에 전달해 주었다. 조선초기 세종대왕 때는 ‘칠정산외편’이라는 역법정비는 물론 각종 과학기기의 발명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슬람 대표들은 임금의 초청으로 궁중에 초대되어 코란까지 낭송할 정도로 우리사회와 이슬람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 상품을 골라 사주고, 한류를 통해 한국사랑을 키워가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서구가 만들어 놓은 편견의 함정에 빠져 친구를 적으로 여기며 갈 수는 없다. 테러 척결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1,500년이라는 깊은 역사를 되새기며 우리 눈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적이 아닌 친구로 끌어안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적 전략만이 실용이고 진정한 국익이 아니겠는가.

이희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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