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국가 배상책임이 있다”며 대법원 판례를 깬 하급심 판결이 두 달 만에 다시 뒤집혔다.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을 받을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다.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 여민숙)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생활을 한 송모씨와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1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3일 밝혔다. 2개월 만에 원고승소로 판단한 1심을 뒤집은 것이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의 부정ㆍ반대 및 폐기 주장이나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금하고, 어길 경우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한 초법적 행정명령이다. 대법원이 2013년 이에 대해 위헌판단을 내린 이후 제기된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에 대해 하급심 판단은 엇갈렸다.
이에 대법원은 지난 해 3월 긴급조치 피해자 최모씨의 국가배상 소송에서 “대통령은 국가긴급권 행사에 관해 국민에게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권리에 대응한 법적 의무까지 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신헌법에 따른 수사기관 및 법관의 체포ㆍ구금 행위가 당시 ‘합법’이라 배상의무가 없다는 판례를 제시한 것이다.
긴급조치 피해자에게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법부에 비난이 쇄도하던 지난 해 9월 1심에서 대법원을 정면 반박하는 판결이 나왔다. 송씨 사건을 담당한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8부(부장 김기영)가 국가의 배상을 인정한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유신헌법이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무를 명시하고 있는 만큼, 긴급조치 9호는 명백히 확립된 헌법ㆍ법률 상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분명하다”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하지만 1심의 판례 항명은 두 달을 가지 못하고 끝이 났다. 2심 재판부는 단 한 차례의 변론기일 만을 가진 뒤 대법원 취지대로 송씨 측의 패소를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이 그 자체로 송씨 등에 대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당시 긴급조치가 위헌ㆍ무효라고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수사ㆍ재판)공무원의 고의ㆍ과실로 인한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송씨는 1968년 5월 북한 경비정에 납치됐다 풀려난 후 미결수 신분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송씨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2014년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