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2일(현지시간) 반정부 시아파 지도자 님르 바크르 알님르를 포함한 시아파 유력인사 4명을 한꺼번에 처형하자 중동 내 수니파와 시아파의 충돌이 거세질 조짐이다.
시아파 맹주 이란이 수차례 사면을 요구했던 터라 사우디의 이번 처형은 그렇지 않아도 위태했던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불화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사우디는 알님르를 알카에다 조직원 등과 같은 날 처형해 테러리스트로 규정함으로써 시아파를 더욱 자극했다. 사우디 내무부가 이날 오후 알님르의 처형사실을 밝히자마자 이란을 위시한 중동 시아파 진영에선 즉각 거세게 대응했다.
이란 외무부는 이날 “사우디는 테러리스트와 극단주의자를 지원하면서도 국내에선 압제와 처형으로 비판세력에 대응한다”며 “이런 정책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란의 고위 성직자 아야톨라 사이드 알모다레시는 “그를 살해한 것은 선전포고”라며 분노를 표시했다. 이란 정부는 주테헤란 사우디 대사대리를 불러 처형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사우디도 이에 대해 주사우디 이란 대사에게 “내정 간섭하지 말라”며 대응했다. 일부 언론에선 이란이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자국 교도소에 수감된 수니파 성직자 20여명을 처형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날 밤 이란 제2도시 마슈하드의 사우디 총영사관 앞에선 이란 시위대가 총영사관에 돌과 불붙은 물건을 던지고 사우디 국기를 찢으면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라크 의회의 시아파 정파인 다와당의 칼라프 압델사마드 대표도 “바그다드 주재 사우디 대사관을 즉시 폐쇄하고 대사를 추방하라”며 “이라크 감옥에 있는 사우디 테러리스트도 모두 처형해버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사우디는 지난달 15일 바그다드에 대사관을 25년 만에 다시 열었다.
레바논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는 알님르의 사형집행이 ‘암살’이라면서 “사우디가 알님르를 죽인 것은 그가 압제받는 사람들(시아파)의 권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시아파 국민이 과반인 바레인에서도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져 경찰이 최루탄으로 진압했다.
시아파와 충돌이 뻔한데도 사우디가 이날 알님르의 처형을 감행한 것은 최근 사우디를 둘러싼 ‘위기론’을 잠재우려는 단호한 결의를 과시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알사우드 왕가는 유가 급락에 예멘 내전의 장기화로 알사우드 왕가의 권위가 도전받는 상황이다.
지역 라이벌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 벨트’에 미치는 정치·외교적 파장보다 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엄단한다는 의지가 우선임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제앰네스티의 필립 루터 중동·북아프리카 국장은 2일 AFP통신에 “사우디는 과거의 원한을 되갚으려고 그를 처형했다”며 “사우디 정부는 반(反)테러리즘의 탈을 쓰고 반대자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사우디에서 소수파인 시아파를 이끌면서 수니파와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가 사우디 정부로선 가시와 같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수괴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지난달 12월26일 발표한 성명이 사우디의 이번 처형 결정에 영향을 준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알바그다디는 이 성명에서 IS를 겨냥해 사우디 주도로 수니파 이슬람 국가 34개국으로 결성된 반(反) 테러동맹에 대해 “이 동맹이 진정한 무슬림 연합이라면 (이교도인) 시아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비꼬았다.
시아파를 배격하는 보수적 수니파 사상인 와하비즘을 근간으로 하는 사우디로선 IS가 수니파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형세를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처형은 고질적인 중동의 종파간 갈등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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