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일어 경기고생 전체가 가두시위에 나서던 무렵에도, 김근태는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는 쪽이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돈을 빌어라도 오겠다는 윤보선보다는, 자립경제를 외치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에 얼마쯤 동조”했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의대나 법대 진학을 원했지만, 적록색약이어서 의대를 포기하고 “일거에 출세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나 가는 곳이라는 생각”때문에 법대도 포기했다. 경제발전이 화두였던 때였고, 그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택했다. 경제학 교수가 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싶었던 그의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의 독재는 도를 더해갔고, 그는 67년 상대 대의원회(학생회) 회장이 되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주도했다.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끌려가서 매맞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지를.” 그 일로 강제징집 당했고, 70년 복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꿈은 교수가 되는 거였다. 하지만 71년 전태일이 죽었고, 72년 유신헌법이 발효됐다. “나는 모른 체할 수가 없었고, 그 현장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수배- 구속ㆍ실형- 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수배- 79년 10ㆍ26까지 도피. 그는 ‘교수 김근태’가 아니라 ‘공소외(外) 김근태’로 불렸다. 재판정의 판ㆍ검사들이 숱한 시국사건에 연루는 됐지만 도피중인 그를 늘 ‘공소외 김근태’라 불러서였다.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 85년 고문ㆍ88년까지 복역-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 92년까지 복역. 그는 26차례 체포돼, 7번의 구류와 5년 6개월의 옥살이를 겪었다.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에게 당한 고문 트라우마로 그는 치과 의자에 앉지도, 만성 비염 코 수술도 받지 못했다. 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정계 진입. 3선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총재를 지냈다.
2001년 6월 월간 ‘해인’에 쓴 에세이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아직 부끄럽다. 아마도 프로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한 점일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그 부족을 끝내 메우지 못했다. 그의 삶이 말해주듯 그의 내면은 누구보다 격정적이었으나 격정을 온전히 드러내기엔 너무 염결하고 온후했다. 김근태를 한 번도 만난 적 없다는 소설가 박완서는 92년 김근태의 옥중편지 모음집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의 발문을 썼다. 글에서 작가는 고문의 공포를 고백하며 “나 같은 건 운동하는 사람하고는 이름도 모르고 지내는 게 수”라며 “나의 안일엔 김근태란 이름 자체가 고문이었다”고 썼다.
김근태는 2011년 12월 30일 64세로 별세했다. 수많은 전ㆍ현직 정치인들이 수다한 말과 글로 그를 추모했다. “역사의 빚” “뜻을 받들어” “꼭 이루겠다”…. 그들 대다수가 지금도 현역 정치인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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