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지 않는 50대 남자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자라고 믿는 20대 여자. 두 사람의 연애는 뻔할지도 모른다. 여자의 싱싱한 생명력에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는 첫 1~2년이 지나고 나면 남자는 차가운 현실로 돌아오고 여자는 온 몸의 눈물을 다 빼낸 뒤 ‘어른’이 될 것이다. 이 공식을 뒤집고 결혼에 이른 두 사람이 있다. 장석주(60) 시인과 박연준(35) 시인이다.
두 사람이 함께 쓴 한 달 간의 시드니 체류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난다)가 출간됐다. 둘은 올 초 혼인 신고를 하며 10년 연인에서 부부로 관계를 전환했다. 그러나 문단 내에서조차 이들의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까지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첫 ‘커밍아웃’인 셈이다. 난다 출판사 편집자인 김민정 시인이 식을 올리지 않은 두 사람에게 책으로 하는 결혼식을 제안하며 성사됐다. 책이 출간된 24일은 결혼기념일이 됐다. 이날 합정역 인근 카페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사랑은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이 퍼뜨린 미신이죠.”
장석주 시인은 독서량이 연애기술과 무관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했다. 준비 중인 책의 내용이긴 했지만 결혼기념일 날 굳이 이런 얘길 하는 남편 곁에서 아내는 씩씩하다. “남들은 당신 요즘 모습이 지금껏 본 중 가장 좋다던데요?”
씩씩한 순정, 박연준 시인의 표현을 따르면 바보 같은 순정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된 2004년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끌어온 주요 동력이었다. 중간에 잠깐 끊겼던 연애를 이어 붙인 힘이기도 하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넌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저도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감히 못했어요. 스물다섯 살, 얼마나 애기예요. 다만 그 감정을 안 놓고 가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예요.”(박연준) “부담스러웠어요. 그러다 보니 마음을 다 열지 못했고…. 늘 결정권이 저쪽에 있다고 생각했죠. 이 사람이 나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장석주)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부부가 되자는 말은 장석주 시인의 입에서 나왔다. 박 시인의 “이상한 관성? 팔자?”라는 표현을 장 시인이 “인연”으로 고쳐준다. 쓰는 단어, 성격, 생체리듬까지 모든 면에서 반대인 두 사람의 면모는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내가 시드니의 한적함과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저녁에 흠뻑 취해 있는 동안, 남편은 성실한 지식 노동자답게 자연에서 문명 전반으로 사유를 확장하며 기계처럼 글을 썼다.
두 사람이 각자 쓴 서문은 일종의 혼인서약서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 시인의 속 마음이 드러나 있다. “‘1인분의 고독’에 웅크려 있던 내 내면을 들여다보니, 거기 두려움이란 짐승이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숨어 있더군요. (…) ‘1인분의 고독’을, 그 자유와 고요를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제 망설임을 떨치고 용기를 냅니다. 사랑이라고 해도 좋아요. 어떤 사이프러스 나무도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남들이 설렘으로 출발할 때 불안과 망설임으로 시작한 두 사람은, 남들이 권태와 실망으로 식어갈 무렵 가장 뜨거운 말을 주고 받는다. “내가 더 사랑하니 내가 강자예요. 바보는 아무도 이길 수 없어요.”(박연준) “아닐 걸요? 사실은 내가 천재의 가면을 쓴 바보거든요.”(장석주)
두 사람은 그럼에도 결혼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보통은 형식을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담는데 우린 내용이 많아져 그게 파열하면서 형식이 필요해진 경우예요.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에 따라 형식을 만들어왔다는 게 참 마음에 들어요. 결혼을 공표하는 방식이 책이란 것도요. 책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잖아요. 이보다 더한 맺어짐이 있을까요.”(박연준)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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