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와 ‘헬조선’처럼 희망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 올해 많이 회자됐다. 내년에는 4월 총선과 이듬해 대선의 영향으로 정치 관련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올해보다 내년이 나을 거라는 희망을 품기 어려워 보인다. 그야말로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난무하는 게 요즘 정치상황이기 때문이다. 주류니 계파니 따지는 패거리 정치가 정치권을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야당이 노골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대며 분열하는 모습을 보자니 낯이 뜨겁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과 여당은 때 아닌 진실타령으로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
특히 정치 품격을 낮춘 장본인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는 독설에 이은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달라는 발언은 협박에 가깝다. 대놓고 줄 세우기 정치를 하겠다는 작심발언이다. 그 결과로 총선 공천을 앞둔 새누리당 예비 후보자들에게서 선거공약이나 정책은 실종되고 ‘진실한 사람’ 마케팅이 성행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무회의에서도 전날 5개 부처 개각과 관련해 “옛말에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한결 같은 이가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며 재차 진실성을 강조했다.
문제는 진실이 어디를 향하는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 발언만 놓고 따지면 국민보다는 대통령을 향한 것 같다. 그런데도 여당 중진 누구도 앞장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앞장서 ‘나는 진실합니다’하며 눈치나 살피는 모양새다. 하긴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찍어내기로 물러났고, 김무성 대표도 개헌 얘기를 꺼냈다 혼쭐난 이후 몸을 한껏 낮추고 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화려한 컴백을 예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장관도 다시 날개를 달 정도로 그 진실의 힘이 세긴 센 모양이다. 문형표가 누구인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관련 뒤늦은 정보 공개 등 총체적 대응 실패로 물러난 지 4개월 남짓이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신임을 잃지 않은 데는 다 까닭이 있다. 수년간 불합리성이 지적되어 온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선안을 다 만들어 놓고도 발표 전날 백지화 시켜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당시 이해할 수 없는 처신의 배경으로 청와대가 지목됐다. 연말정산 파동으로 요동치는 민심에 놀란 청와대가 보험료 인상이 필연적인 대목에서 막판에 생각을 바꿨다는 관측이 컸다. 전임 진영 장관이 기초연금 후퇴를 둘러싸고 주무부처 장관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가 6개월 단명으로 물러난 것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꽉 막힌 정국을 해결하고 국민들의 정치 불신을 거두기 위해선 일단 대통령부터 국민들 앞에 진실해질 필요가 있다. 우선 대통령만 아는 그 진실을 풀어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혼이 비정상’이 된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경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노동5법 통과를 부르짖더니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황우여 교육부총리를 당으로 복귀시키는 이율배반적 인사를 단행했다. 진정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국정과제를 힘있고 안정적으로 수행하도록 단속을 했어야 맞다. 이른바 대통령 관심법안으로 분류되는 노동5법도 처리되지 않으면 국가비상사태가 온다고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압박할 게 아니라 설득을 했어야 옳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여야가 기간제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고 파견근로자 허용업종을 넓히는 등의 내용을 높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마당에 과연 개혁인지 개악인지 따져보게 국회에 맡겨둬야 한다. 해마다 교육대란을 일으키는 누리과정 예산 역시 대선공약을 왜 교육청에 떠넘길 수밖에 없는지 알아듣게 해명해야 한다. 언제까지 모호한 단어를 써가며 충성만 강요할 것인가.
“우리 국민들의 정치 수준도 높아져서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인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라는 6월 25일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다시 곱씹어 본다.
채지은 기획취재부 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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