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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는 일본 4등분, 미영중소 분할통치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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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는 일본 4등분, 미영중소 분할통치 계획했다

입력
2015.12.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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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얄타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앞줄 왼쪽부터)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림 1얄타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앞줄 왼쪽부터)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리 건강하지 못한 몸을 추스르며 연합국을 이끌던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치 독일 패망을 눈앞에 두고 1945년 4월 12일에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 괴벨스는 “여황제가 죽었다”고 외쳤다. 뜬금없어 보이는 이 발언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2세기 전에 유럽에서 벌어진 7년전쟁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 여황제 엘리자베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연합해서 후세 독일의 영웅이 된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국왕을 패배 일보 직전까지 몰아 부친 순간인 1762년 1월 5일 갑자기 숨을 거뒀다. 후임 황제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열렬히 흠모하던 인물인지라 러시아 군대를 거둬들였고, 프리드리히 2세는 하늘이 준 듯한 이 기회를 틈타 전세를 뒤엎었다. 패망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상황에서 파울 괴벨스 나치 선전장관은 루스벨트의 죽음이 엘리자베타의 죽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믿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힘을 북돋고자 괴벨스는 7년전쟁에서 그랬듯 전황을 돌이킬 대역전의 필연성이 별점에도 나와있다고 히틀러에게 떠들었다. 4월 16일에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붉은 군대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던 독일 장병에게 보내는 서한을 구술했다. “세계 최대의 전범이 이제 사라졌으므로 전쟁의 흐름도 바뀔 것이며, 유럽은 결코 러시아의 영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히틀러는 러시아가 유럽 전체를 넘보는 상황에서 영국과 미국이 입장을 바꿔 독일과 손을 잡고 공산주의에 맞설 전혀 새로운 연합군을 결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부전선에서 독일 비행기들은 ‘슬라브 열등인간에 맞서 함께 유럽 문명을 지키자!’는 전단을 영미군 병사 머리 위에 흩뿌렸다.

그림 21942년에 영국이 만든 전시포스터로 밑에 "희망의 별 - 하르코프와 크림반도에서 사투를 벌이는 붉은 군대는 여전히 자유 세계의 희망"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영국과 소련이 얼마나 서로에게 절실한 동맹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림 21942년에 영국이 만든 전시포스터로 밑에 "희망의 별 - 하르코프와 크림반도에서 사투를 벌이는 붉은 군대는 여전히 자유 세계의 희망"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영국과 소련이 얼마나 서로에게 절실한 동맹이었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히틀러와 괴벨스의 행태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허둥대는 사람의 심경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두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을 보는 인식의 근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유럽과 세계의 패권국가인 영국과 각각 그 동쪽과 서쪽에 있는 대국 소련과 미국이 독일에 맞서 결성한 연합의 위력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그 연합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인 국가들의 일시적 제휴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유지에 골몰하는 영국 ▦자유무역으로 자본주의의 종주국이 되려는 미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타도하려는 공산주의 이념의 본산인 소련 이 세 나라의 연합은 물과 기름과 불을 뒤섞은 꼴이니 언젠가는 반드시 깨진다고 본 히틀러와 괴벨스의 생각이 그렇게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그런 판단 때문에 복수심을 이글이글 불태우는 붉은 군대가 베를린으로 물밀듯 몰려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패전을 피할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영국 소련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공업생산력 격차를 보여주는 통계 자료가 알려주듯, 연합국이 추축국을 이길 확률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률은 확률일 뿐이지 필연은 아니며, 숱하게 많은 변수가 복잡하게 작용하는 대 전쟁에서 공업생산력 우세가 자동적으로 전투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연합군 승리의 밑바탕은 연합국 세 나라가 극복하기 어려운 이질성을 견뎌내며 끝까지 유지한 단합이었다. 개성 강하기로 이름난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국의 이익을 좇으면서도 연합의 큰 틀을 깨뜨리지 않는 대인 기질을 발휘했다. 히틀러가 헛다리를 짚은 셈이다.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맞서 똘똘 뭉쳤다고는 해도 미국 영국 소련의 연합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혁명가였던 스탈린은 제국주의자 처칠이 지난날 공산주의를 전염병 취급하며 러시아 혁명이 요람에 있을 때 혁명 러시아를 목 졸라 죽이려 했음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처칠은 유럽 본토 상륙작전을 미루며 스탈린의 줄기찬 “제2 전선” 요구에 난색을 표했고, 스탈린은 영국을 겁보 취급해서 처칠의 화를 돋웠다. 처칠은 대서양을 오가며 루스벨트와 자주 만나 친분을 과시했지만, 이 미국 대통령은 1943년 말까지 스탈린을 만난 적이 없다.

삐걱거리는 연합이 굳건해진 계기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1943년 11월에 이란의 테헤란에서 가진 3두(頭) 회담이었다. 처음 만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곧 의기투합했다. 처칠은 자기가 루스벨트와 매우 친하다는 이미지를 선전했지만, 일종의 짝사랑이었다. 루스벨트는 대영제국의 블록 경제를 고수하는 제국주의자 처칠이 못마땅했다.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은 뾰로통한 처칠을 몰아붙여 이듬해에 제2전선을 형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루스벨트는 자기가 구상하는 전후의 평화 체제에서 소련이 한 축을 맡아야 한다고 보았고, 사람 못 믿기로 이름난 스탈린이 그답지 않게 루스벨트는 신뢰했다. 두 거두 사이에 낀 처칠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1945년 2월 초순에 세 사람이 소련 영토인 얄타에서 다시 모였을 때, 처칠은 이 회담이 3두 정상회담이 아니라 실은 2.5두 정상회담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얄타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일본과 싸워달라고 간곡히 요청했고, 스탈린은 독일을 무너뜨리고 세 달 뒤에 일본과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훗날 냉전 시기에 서방의 정치가와 학자들은 일본과의 전쟁에 괜히 스탈린을 끌어들였다며 루스벨트를 비판하게 된다. 그러나 얄타 회담 때에도 전쟁이 끝난 상태가 아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루스벨트에게 스탈린을 전후 세계의 평화 체제에 없어서는 안될 파트너로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스탈린은 소련이 파시즘에게 거둔 승리를 유럽 공산주의 혁명의 발판으로 여기는 유럽 좌파의 기대를 저버리면서까지 이념을 뒤로 물리고 미국의 협조를 얻어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보하는 데 치중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스탈린의 본 모습은 열혈 혁명가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 정치가였다. 미국과 소련의 지속적 공조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루스벨트가 숨지자 부통령 트루먼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트루먼은 스탈린을 믿지 않았고, 스탈린에게 트루먼은 루스벨트와 달리 자기와 더불어 세계를 경략할 만한 큰 그릇이 아니었다. 연합은 깨지지 않았지만, 전후 세계 정세의 향방에는 미묘한 교란이 일었다. 유럽의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사실상 저항을 포기한 탓에 베를린을 향한 영미군의 진격에 가속이 붙자, 초조해진 스탈린은 베를린 함락을 서둘렀다. 다 끝나가는 전쟁에서 자국 장병 30만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차지해야 할 만큼 그에게 베를린의 선점은 전후 세계의 정치지형 형성에 중요했다. 1945년 4월 말에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고, 5월 8일에 유럽의 전쟁은 끝이 났다.

히틀러가 “천년 동안 패한 적이 없는 제국”이라고 높이 평가한 일본은 이제 모든 동맹국을 잃고 홀로 연합국에 맞섰다. “1억 옥쇄”를 통한 결사항전을 외치면서도 일본의 전쟁 지도부는 6월부터 물밑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시도했다. 종전을 모색하라는 히로히토 일왕의 지시에 항복 반대 세력은 소련의 중재를 기다려보자며 대응했다. 소련과 일본은 1941년 4월에 체결된 일본-소련 중립조약을 전쟁 내내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우선 두 나라 사이에는 교전이 없었다. 더욱이 일본은 태평양 북부 해역을 거쳐 소련에 흘러 들어가는 미국의 무기대여법 물자의 보급선을 끊어달라는 동맹국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으며, 소련은 소련대로 자국 영토를 항공부대 발진기지로 미국에게 내주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 막대한 물자를 팔아서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전쟁수행노력을 도왔다.

1945년 7월 하순에 스탈린, 트루먼, 처칠은 포츠담에 모여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은 이를 곧바로 거부하면서도 속으로는 소련이 일본과 싸우지 않고 일본과 영국 및 미국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면 조건부 항복을 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8월 6일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는데도 일본은 버텼다. 9일에는 상황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 지도부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동원된 붉은 군대는 파죽지세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밀고 들어왔다. 일본의 관동군은 하릴없이 허물어졌다. 일본 지도부의 기대가 무참히 깨졌다.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이라는 이중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일본의 전쟁 지도부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여야 했다.

루스벨트가 죽지 않고 전후에도 미국 대통령 직무를 수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에게는 항복한 일본을 독일처럼 나누어 점령할 계획이 있었다.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본을 4등분해서 통치하고자 했던 것이다. 연합국 사이에는 전범 국가를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이 약속돼 있었다. 이를 확정하고자 스탈린은 홋카이도에 붉은 군대를 투입할 계획을 추진했지만, 트루먼의 비위를 건드릴까 봐 마지막에 그 계획을 포기했다. 일본이 연합국에게 분할 점령되었다면, 전후의 세계와 한반도의 운명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이 한 개인의 운명에 따라 바뀌는 드문 변곡점이 있다면, 20세기의 변곡점은 아마도 루스벨트가 죽은 1945년 4월 12일일 것이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류한수 상명대 교수
류한수 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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